재물신의 이름과 마음
재물신의 이름과 마음
흔히들 “돈에 눈이 있다”는 말들을 한다. 물론 눈이 있다.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님이 버젓이 눈을 뜨고 계신다. 하지만 상징적인 눈을 말하는 것이 아닌 의식적인 눈을 말하는 것이다.
돈에는 어떤 원칙과 같은 분명한 의식이 있다. 이는 감상적으로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답답한 마음에 심산유곡의 모양 그럴듯한 바윗돌에다가도 하나둘 차차로 물이라도 한 대접 떠놓고 소원을 빌어댈라치면 그 애틋한 심정들이 스멀스멀 바위에 배어들어 뭉쳐진 기운이 정령으로 일어나 의식의 문을 열고는 신령행세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하물며 온 세상의 사람들이 밤낮으로 눈 벌겋게 뜨고서 구하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빌어대는 돈에 의식이 없다 함은 달에 토끼 있다는 말과 같이 된다.
세상의 표리로 엄존하는 상대적인 기운의 어울림은 현시되는 세상에서보다 보이지 않는 이면의 세상에서 더욱이 그 실체적인 진리를 이채롭게 행사하고 있다. 그 설명하는 본성이 눈에 보이는 당연한 이치에도 닿아 있지 못한, 갈고 다듬어야 할 마음에 도리어 강박감을 조성하여 자기네 잇속을 챙기는 상술에 불과한 믿음 장사꾼들의 먹이가 되기보다 자기의식에 부담 없이 담을 수 있는 인식을 믿는 자기 확인이 세상의 자타에 이로운 선택이 된다.
재물신의 이름은 정재이다. 재물신의 의식이 발하는 마음은 컬러가 아닌 흑백이다. 까만 것과 흰 것만을 인식한다. 이는 선악의 개념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다. 다만 자기를 인정하고 아끼는 놈이 흰 것이고 소홀히 대접하는 놈이 까만 것이다.
예를 들어 택시를 탄다. 요금이 사천 칠백 원 나왔다. 까짓 거스름 삼백 원 받아 쥐려니 쪼잔한 생각이 든다. 그래서 잔돈 됐습니다. 하고 택시를 내린다. 주로 사소하게 느끼는 이러한 상황들에서 재물신은 삐치게 된다.
재물 신의 의식은 일 원, 백 원, 천, 억 하는 액수에 대한 개념은 없다. 그 크고 작음은 사람의 운명 속에서 에너지가 회전하는 주고받음의 크기에 따라 사람의 인식에 자리하는 개념일 뿐이다. 바늘에 손가락이 찔리면 손가락이 아니라 내가 아픔을 느끼는 것처럼 재물 신의 의식 또한 이와 같은 마음에서 자기를 소홀히 대접하는 것으로 인식을 한다. 그래서 이놈은 나를 진정으로 아껴주는 놈이 아니다. 하고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그 품에서 빠져나갈 궁리만을 한다.
그때부터는 그 주머니의 돈은 어떻게든 남의 돈이다. 그렇지만 재물신의 의식이 단순하다 하여 무작정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여자의 감정처럼 상황에 따라 단순한 것이다. 이유 있는 대가 이외의 지출에 대하여서는 마누라처럼 세심한 것이 재물신이다.
마누라가 남편을 바라봄에 있어 요것이 출장을 갔다 왔는지 샛 거리를 보고 왔는지를 감별하듯이 지출상황을 감별한다.
택시를 타고서 기사분의 친절함에 고마움을 느껴 그 마음을 표현하는 이유 있는 지출이었다면 그 액수의 크기에는 관계가 없다. 그래서 재물신은 아내의 정숙함을 자랑하는 남편의 마음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품을 난데없이 벗어날 마음 따위는 일으키지 않는다.
금전적인 자선을 베푸는 것에서도 마찬가지다. 노력하는 이에 대한 노력의 긍정성을 보조하기 위해 베풀었는지, 멀쩡하지만 게으른 탓에 어려움을 자초한 이에게 다만 감상적인 마음으로 자선이라는 사치를 행사하였는지를 재물신은 감별하는 것이다. 후자라면 재물신은 아내를 푸대접하는 불량남편의 행동으로 인식을 하게 된다. 푸대접을 받는 아내가 보따리를 꾸리기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심정의 발로이다.
자신이 재물신을 어떻게 대하고 있었는가를 현실적으로 확인해보고자 한다면 남자라면 그 아내를 여자라면 그 자식을 보면 된다. 이 관계는 운명적인 연결 속에서 상대적인 연관성을 분명히 가진다.
세상 삶은 재(몸과 재물)로 시작해서 재의 고갈로 끝나게 된다. 재는 현신이며 현신을 동작하게 하는 에너지인 까닭이다. 이 현신에 동반된 에너지는 의식적인 상황에 따라 시작과 결과를 부합하게 한다.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말이다.
어떤 이의 운세가 재물 운에 닿아 있어 운세를 따라 돈이 들어와도 그 의식이 용처를 정립하고 관리하지 못하면 반드시 들어온 크기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뚫리는 구멍으로 새어나가게 된다.
재물신이 들고 나는 것은 이미 닦여져 있는 음덕에서 비롯되는 운세도 중요하다지만 현재를 관리하는 의식의 여부에도 그에 못지않은 기운의 작용이 미치게 된다. 운세와 의식은 음양 한 벌로서 세상 삶의 성사를 이끄는 까닭이다. 운세의 호악 역시 자기의식의 줄기가 만들어낸 자기 기운의 흐름인 때문에 운세를 믿는다, 믿지 않는다. 하는 철없는 논란 질에 동참하여 괜하게 애꿎은 눈알 충혈 시키기보다 자신의 몸과 그 몸으로 일으키는 에너지를 관리하는 자기의 의식적인 내용을 살펴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이 자기 삶을 이끌어 감에 있어서 바람직한 내용이 되겠다.
정재라는 재물신의 이름에서 감 있는 사람은 재물신이 여신임을 짐작할 것이다. 이 여신은 아가씨가 아닌 아줌마다. 이 아줌마는 예쁘고 상냥하기도 하지만 사소한 것에 삐치기도 잘하고 때로는 수다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성실한 남편을 내조하는 장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 아줌마를 아내로 두고 있는 남자는 삶 속에서 언제나 자신감이 넘쳐난다. 하지만 남편이 불성실한 모습을 보이면 언제든 만만하게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만만치 않은 아줌마다.
이 아줌마가 떠나고 난 다음의 재결합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아줌마가 콧대를 세우기 시작하면 재벌 남편도 벌벌 기어야 한다. 있을 때 잘하란 말의 원조가 이 아줌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아줌마를 친구로 삼을 수 있기를 사전을 끼고 빌어야 한다. 그렇게 이 아줌마의 엉덩이를 두드릴 수 있다면 복 중에 그만한 복은 없다. 에너지가 충만해야 활동이 건실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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