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란님의 납음오행

명리동네 이야기|2022. 4. 24. 12:18

오미란님의 납음오행

甲子란 대요씨로부터 비로소 완성되었고, 납음은 귀곡자로부터 완성되었으며, 상象은 동방東方 만천자曼天子 때에 이미 그 상을 완성하였던 것에 연유하여 화갑자花甲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갑자란 子로부터 亥에 이르는 십이궁十二宮이 각각 金木水火土에 속하는 것이니 처음으로 子에서 일양一陽이 일어나고 마지막으로 亥에서 육음六陰이 되는 것이다. 그 오행이 속한 바가 단지 인간의 세사世事(세상일)와 같은 것이다.

어찌하여 세상일이라 하는가? 대체로 오행의 금목수화토란 하늘에 있어서는 오성五星(금성, 수성, 화성, 목성, 토성)이 되고, 땅에 있어서는 오악五嶽(태산, 화산, 형산, 항산, 숭산)이 되며, 덕德에 있어서는 오상五常(五倫. 仁, 義, 禮, 智, 信)이 되고, 인간에게 있어서는 오장五臟(간장, 심장, 비장, 폐장, 신장)이 되어 그것이 명命이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갑자에 속하는 것이 바로 명命에 응하고 명命은 곧 일세一世의 일이다.

그러므로 갑자납음의 상일 때를 성인이 비유한 것도 역시 인간 일세一世의 사리事體(사리, 도리)와 같은 것이다. 일세지사一世之事란 공자의 이른바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을 말하는 것이다. 그 갑자의 상은 子로부터 亥에 이르기까지 그 이치를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즉 子丑의 이위二位는 음양이 비로소 잉태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인간이 포태胞胎한 것처럼 식물이 뿌리를 간직하나 아직 애제涯際(한계. 끝)가 있는 것은 아니다. 寅卯의 이위二位는 음양이 점차 열리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인간이 점점 생장하는 것처럼 식물의 껍질이 터져 싹이 나와서 뭇 꽃이 점점 피어나는 것이 마치 사람이 장차 입신출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辰巳의 이위는 음양의 기가 성한 것과 같은 것이니 식물이 마땅히 빛나고 수려한 것처럼 인간이 30, 40에 이르러 입신출세하여 진취하는 상象과 같은 것이다. 午未의 이위는 음양이 밖으로 드러내는 것과 같은 것이니 물체의 색이 일제히 이룬 것처럼 인간이 50, 60에 이르러야 부귀빈천을 알 수 있으므로 대체로 모든 성쇠를 알 수 있는 것이다.

申酉의 이위는 음양이 숙살肅殺하는 것과 같으니 사물이 이미 수렴하여 이룬 것처럼 인간이 이미 움츠려서 각각 그 고요함을 얻는 것이다. 戌亥의 이위는 음양이 닫힌 것과 같으니 사물의 기가 뿌리에 귀착한 것처럼 인간은 마땅히 휴식하며 각각 귀착함이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십이위十二位만을 상술하였으나 선후가 뚜렷하여 볼 수가 있는 것이니 육십갑자에서 차례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해설> 납음은 원래 육십갑자의 음을 오행음(궁상각치우)과 짝을 지어 얻은 오행이나 그 순서와 원리는 대우주의 전개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곧 오행의 수리에 의하여 추산하는 것이다.

납음오행은 천지의 대연수인 49수를 육십화갑자의 오행수에 적용한 것이다. 즉 육십화갑자의 오행수란 다름 아닌 음양의 조화에 의해 만물이 생성해 나가는 순서를 숫자와 오행으로 표시한 것을 말한다. 또한 그것은 일년을 표준으로 하여 동지에 一陽이 생겨나서 陽이 어른스러운(老成) 申位까지 음양의 배합이 나뉘는 점까지를 관찰하는 원리이다. 다음은 납음오행을 산출하는 방법이다.

巳亥: 四, 戊癸辰戌: 五, 丁壬卯酉: 六, 丙辛寅申: 七, 乙庚丑未: 八, 甲己子午: 九는 "干支合 數値表"이다.

一(水), 二(火), 三(木), 四(金), 五(土)는 생수生數이고 六(水), 七(火), 八(木), 九(金), 十(土)는 성수成數인데 이것은 "五行生成數理表"이다.

甲子乙丑海中金의 원리를 살펴보면, 간지합충수치표에 의하여 甲子乙丑의 총수는 9(甲)+9(子)+8(乙)+8(丑)=34가 된다. 이 수를 천지대연수인 49수에서 빼면 15가 남는다. 이 15를 생수生數의 만수滿數인 5로 나누면 5가 남는다(나머지가 없기 때문에 5를 사용함). 오수五數는 오행생성수리표에 의하면 土가 된다. 그러므로 甲子乙丑이 합하여 생성되는 것은 오수五數인 土가 생성하기 때문에 金이 되는 것이다.

또 子丑은 방위상 북방이고 북방은 水位이다. 이것은 깊은 겨울의 깊은 물이기 때문에 海中에 있는 金이 되는 것이다.

육십갑자에서 甲은 천간의 첫 번째 자리이고 子는 지지의 첫 번째 자리이므로 甲子에서 一陽이 소생하여 춘기春氣가 다가오는 것이다. 甲子로부터 壬申에 이르면 아홉 번째가 되어 구수九數가 되니 陽의 만수滿數이고 노양老陽이다. 甲子, 乙丑, 丙寅, 丁卯, 戊辰, 己巳, 庚午, 辛未, 壬申 중에서 甲은 己와 합하고 子는 午와 충하는 것이니 甲己子午는 동수체同數體가 되어 九가 되는 것이다.

또 乙丑은 陽의 만수滿數인 壬申까지가 여덟 번째 자리(八은 老陰이라 함)가 되고 丑의 대극위對極位는 未가 되니 丑未가 상충相 하고 乙庚이 합하므로 乙庚丑未는 八이 되는 것이다. 나머지도 이와 같이 하면 간지합충수치가 나온다.

물론 납음오행에 대한 오늘날의 관점은 다소 부정적이다. 그러나 이는 위와 같이 나름대로의 체계적인 방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것은 고대인들이 수많은 세월을 통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몸소 체험한 세계이다. 이러한 유산을 아무런 검증 없이 무시한다는 것은 명리학을 배우는 후학으로서 올바른 자세가 아닐 것이다. 음양오행이 정치사상사에서 실패하였다 하여 미신의 온상으로 치부恥部하는 어리석은 정치사상가들이 과연 중의학과 명리학, 그리고 도교의 무술이론에서 그 과학성을 발휘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묻고 싶다. 근대의 사상가 양계초는 음양오행설의 역사라는 그의 논문에서 “이러한 이상야릇한 체계(음양오행을 말함)가 마침내 이천 년 동안 모든 사람들의 심리에 뿌리내렸고 모든 사람의 일을 지배하였다. 아아, 우리의 생사와 관련된 의약도 모두 이러한 관념의 산물이며,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중화민국의 국기도 이러한 관념이 가장 잘 드러난 표상이니 또 무엇을 말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인간이 세상사를 완벽하게 알 수는 없으나 한 개인의 이러한 어리석은 판단이 이렇듯 명리학을 미신이라 여기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신중하고 겸손한 자세로 학문에 임해야 할 것이다. 만약 고대의 학문을 부정한다면 우리의 근간을 부정하는 것이니 음양오행론을 부정하는 자들이야말로 음양오행의 어떤 이론도 차용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세상에 대한 안목은 아는 만큼만 형성된다. 우레 소리가 크다 한들 귀머거리에게서 감응을 얻어낼 수 없는 것이고 금강산이 절경이라 한들 소경에게서 감탄을 자아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명리학 역시 모르는 사람을 설득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불신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진리는 허공의 메아리일 뿐이나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있어서 작은 징후일 망정 진리를 깨닫는 계기가 될 것이다.

...<甲子乙丑海中金> 子는 水에 속하고 또 호수가 되고 또 수왕지水旺地가 되며 겸하여 金은 子에서 死가 되고 丑에서 墓가 되니 水가 왕성하고 金은 死墓가 되므로 바다 속에 있는 金이라고 한다. 또 이르기를, "氣에 있어서는 속에 품어서 극하게 되면 깊이 가라앉아 잠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해설> `金은 子에서 死가 되고 丑에서 墓가 되다`란 庚金이 子에서 死地가 되고 丑에서 墓地가 되는 십이운성을 말하는 것이다.

`바다 속에 있는 金이다`란 바다는 水이고 金과 水는 음기陰氣이니 이것은 음기가 극에 달하였음을 표현한 것이다.

`기에 있어서는 속에 품어서 극하게 되면 깊이 가라앉아 잠기다`란 子의 동지부터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一陽이 발생한다고 하며, 이것은 `음기가 극성하면 양기가 발생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다 속의 金(海中金)`이란 음기가 물러나고 비로소 양기가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또 甲子와 乙丑에서 甲乙은 봄의 양기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子丑은 비로소 양기가 잉태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丙寅丁卯爐中火> 寅은 三陽이 되고 卯는 四陽이 되니 火는 이미 득위得位하고 또 寅卯의 木으로써 이를 생하므로 이 때는 천지가 화롯불을 피워서 만물이 비로소 발생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노중화爐中火라고 한다. 천지는 화로가 되고 음양은 숯불(炭)이 되는 것이다.

<해설> 子(동지): 一陽, 丑: 二陽, 寅: 三陽, 卯: 四陽, 辰: 五陽, 巳: 六陽이 발생하고 午(하지): 一陰, 未: 二陰, 申: 三陰, 酉: 四陰, 戌: 五陰, 亥: 六陰이 발생하는 것이다.

`火가 이미 득위하고 또 寅卯의 木로써 이를 생하다`란 寅 가운데에는 丙火의 장생을 寅卯의 木이 생한다는 의미이다.

`천지가 화롯불을 피우다`란 문장의 말미에서 천지는 화로에 비유하고 음양은 숯불에 비유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곧 甲子와 乙丑으로써 양기를 일깨운 뒤에 丙寅과 丁卯로써 만물을 소생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화로 속의 불(爐中火)은 만물을 소생시킨다는 뜻이다.

...<戊辰己巳大林木> 辰은 벌판(原野)이 되고 巳는 六陽이 되니 木이 六陽에 이르면 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하므로 큰 숲의 나무(大林木)가 무성하게 벌판 사이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대림목大林木이라고 한다. 소리(명예, 가르침, 소문)가 九天(하늘의 중앙. 하늘)에 널리 퍼뜨리니 陰이 만경萬頃(한없이 넓은 모양)에 생겨나는 것이다.

<해설> 양기가 극에 달하여 만물이 극성한 것을 비유하여 대림목大林木이라고 한 것이다.

`소리가 구천에 널리 퍼뜨리니 음이 만경에 생겨난다`란 물극필반物極必反(사물의 발전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反轉한다)을 표현하는 것이다. 사월巳月은 양기가 극에 달한 시점이다. 오월의 하지로부터 음이 생겨나기 바로 전에 양기가 극성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戊는 무성함을 상징하고 己는 형상의 완성을 상징하는 전환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庚午辛未路旁土> 未는 乙木이 지장되고 乙木이 午를 생하여 火가 왕성하니 火가 왕성하면 土는 여기에서 형벌을 받으므로 土가 생하더라도 아직 만물을 생육할 수 없어서 마치 길가의 흙(路旁土)과 같은 것이다. 제때에 따라 힘을 내고 후덕함을 이용하여 나무(木)가 가득 차나 (土가) 많더라도 역시 木을 기뻐하지 않는다.

<해설> 길가의 흙(路旁土)란 쓸모가 없는 흙을 말하는 것이다. 庚은 午에서 沐浴地가 되고 辛은 未에서 衰地가 된다. 이것은 土가 만물을 생육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앞의 대림목大林木 다음이니 더 이상 사물을 생육시켜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제때에 따라 힘을 내고 후덕함을 이용하여 나무(木)가 가득 차다`란 앞의 대림목을 말한 것이고 `(土가) 많더라도 역시 木을 기뻐하지 않는다`란 노방토路旁土는 목을 기뻐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이니 대림목 다음은 노방토가 되어 사물을 생육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壬申癸酉劍鋒金> 申酉金의 正位는 申이 임관臨官이고 酉가 帝旺이니 金이 이미 생왕生旺하였으므로 金은 진실로 강剛한 것이다. 강한 것이 곧 검봉劍鋒(칼의 끝)을 벗어나지 못하므로 칼끝의 金(劍鋒金)이라고 한다. 무지개의 광채가 북두칠성과 견우성을 맞히니 시퍼런 칼날이 설상雪霜을 응결한다.

<해설> 庚金은 申에서 임관지臨官地가 되고 酉에서 제왕지帝旺地가 되니 壬癸水는 金이 생왕하여 매우 강하게 된 것이다.

`강한 것이 곧 검봉을 벗어나지 못하다`란 가을의 숙살기肅殺氣가 만물을 수렴하고 있음을 검봉에 비유하는 것이다. ‘검봉을 벗어나지 못하다’란 검봉이 매우 예리하다라는 의미로서 극성한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무지개의 광채가 북두칠성과 견우성을 맞히다`란 북두칠성은 북쪽(겨울)을 의미하고 견우성(독수리 자리)은 여름 하늘의 대표적인 별자리로 여름을 의미하며 무지개의 광채란 긴 다리를 비유하니 검봉금은 여름과 겨울을 잇는다는 뜻이다.

`시퍼런 칼날이 설상을 응결한다`란 가을의 숙살기가 다하면(시퍼런 칼날이 검봉을 떠나면) 겨울(雪霜)이 온다는 의미이다.

...<甲戌乙亥山頭火> 戌亥는 천문天門이 되고 火가 천문을 비추니 그 빛이 높이 오르므로 산두山頭(산의 정상)의 火라고 한다. 하늘 끝(혹은 하늘가)에 빛을 비스듬히 비추고 산의 정상에 석양이 지니 아름다움이 흩어짐으로 인해서 저녁놀이 되고 놀이 펼쳐져 본래 스스로 빛을 남기는 것이다.

<해설> 천문은 上帝가 거처하는 자미궁문紫微宮門을 말한다. 즉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 의미는 천명을 다했으니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계절의 끝을 석양에 비유한 것이다. 山頭火는 노을을 비유한 것이다.

...<丙子丁丑澗下水> 水는 子에서 왕성하고 丑에서 衰하니 왕성하나 쇠약한 즉 강물이 될 수 없으므로 적시어 내려가는 물(간하수澗下水)이라고 한다. 산은 가는 물결이 둘러 쌓여 있고 눈이 날리나 여울이 솟아나서 협곡으로 흘러내리므로 산골짜기의 팔천척八千尺(대단히 높거나 대단히 깊음을 이름)에 도달하는 것이다.

<해설> 강물이 될 수 없는 적시어 내려가는 물이라 하더라도 심천深川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비록 현재의 성세盛世(한참 융성한 세대)는 아니라 하더라도 향후의 밑거름이 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戊寅己卯城頭土> 천간의 戊己는 土에 속하고 寅은 간위산艮爲山이 되니 흙(土)이 쌓여서 산이 되었으므로 성벽 꼭대기(城頭)의 흙이라 한다. 천경天京(하늘나라의 서울)의 옥루산玉壘山과 경도京都(서울)의 금성金城은 지세가 험준한 것이 용이 서린 것과 같은 천리의 형상이고 범이 무릎을 세우고 앉은 것처럼 사방의 세력과 같은 것이다.

<해설> 寅方은 艮爲山 즉 동북쪽이다. 그러므로 흙이 쌓여서 성벽 꼭대기만큼 흙이 쌓였다는 의미이다. 하늘나라의 옥루산이나 서울의 성곽이 난공불락難攻不落인 것처럼 위엄과 위용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변화가 없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庚辰辛巳白蠟金) 庚은 辰에서 부양하고 巳에서 장생이나 형질이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니 아직 단단하고 예리할 수 없으므로 백랍벌레의 수컷 애벌레가 분비한 납을 가열 용해하여 찬물로 식혀서 만든 金(백랍금白蠟金. 백랍은 고약이나 초 등에 씀)이라 한다. 氣가 점점 발생하나 약한 金이 광석에 있으니 일월의 빛이 서로 접근하고 음양의 기가 응결하는 상이다.

<해설> 아직 단단하고 예리하지 않은 金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金은 숙살기이니 숙살하는 시기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하늘나라의 옥루산처럼 난공불락의 위엄(만물이 극성極盛한 시점을 비유함)을 지녔다 하더라도 자연은 변화하는 것이 법칙이니 서서히 변화의 조짐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壬午癸未楊柳木> 木은 午에서 死가 되고 未에서 墓가 되어 木은 이미 死墓가 된다. 비록 천간에서 壬癸의 水를 얻어 木을 생한다 하더라도 마침내 유목柔木이 되므로 양류목楊柳木(버드나무. 갯버들과 수양버들)이라 한다. 모든 실이라 하여 잠사蠶絲(고치실)가 아닌 것과 같고 모든 가늘고 긴 것이라 하여 침(針)이 아닌 것과 같다.

<해설> 이것은 甲木이 죽고 乙木이 생장하는 것으로 壬午와 癸未를 설명하는 것이다. 버드나무는 柔木의 비유이다. 버드나무는 가늘고 긴 가지가 축 늘어지며 봄에 꽃이 피고 삭과 버들개지는 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특성이 있다. 이것은 약하나 끈질기고 부드러우나 강인한 어린아이에게 비유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 여리나 성숙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모든 실이라 하여 잠사가 아닌 것과 같고 모든 가늘고 긴 것이라 하여 침이 아닌 것과 같다`란 이것은 유목柔木을 비유한 것이다. 유목이 비록 나무이기는 하나 여리기가 그지없는 나무이며 강목剛木이 아니라는 뜻이다.

...<甲申乙酉泉中水> 金이 申에서 임관臨官이고 酉에서 帝旺이니 金은 이미 生旺한 즉 水가 이로써 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야흐로 생하는 가운데의 역량은 아직 큰물이 아니므로 우물물(井泉水)이라 한다. 기氣가 멈추어 고요하니 한도를 넘더라도 다 없어지지 않고 나아가더라도 궁하지 않은 것이다.

<해설> 庚金은 申에서 임관臨官(祿)이고 酉에서 帝旺이니 金은 水를 생할 수 있으나 역량이 부족한 우물물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甲申과 乙酉는 우물물과 같이 크게 만족할 수 없다하더라도 필요한 만큼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기가 멈추다`란 겨울이 왔음을 나타내는 비유이다.

`한도를 넘더라도 다 없어지지 않고 나아가더라도 궁하지 않다`란 비록 겨울이 되어 만물이 겉으로는 시든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 내부에는 우물물처럼 다음 봄에 싹 틔울 기를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丙戌丁亥屋上土> 丙丁은 火에 속하고 戌亥는 천문이다. 火는 이미 염상炎上(불꽃을 내면서 타오르다)인 즉 土가 아래에 없더라도 생하므로 옥상屋上의 흙이라 한다. 火木이 生旺하기 때문에 이것은 그 세력을 증강하는 것으로부터 사절死絶하기에 이르기까지 기뻐서 편안한 것이다.

<해설> 천문은 겨울을 의미하고 변화를 나타낸다. 옥상의 흙이란 만물을 생육하는 데에는 쓰임새가 별로 없는 흙, 즉 동토凍土(언 흙)를 의미하나 내부는 火木(陽氣)가 생왕하기 때문에 생왕지(春夏)이든 사절(秋冬)지이든 어느 때든지 생명의 불씨를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겨울의 나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쉬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戊子己丑霹靂火> 丑은 土에 속하고 子는 水에 속한다. 水는 正位에 거처하고 납음이 바로 火이니 水 가운데에 火가 있는 것이다. 용왕이 아닌 즉 없는 것이므로 벽력화霹靂火(천둥. 벼락)라고 한다. 번갯불이 공중에서 번쩍하며 전광電光의 세력이 있고 구름이 무장한 기병을 좇아 분주한 것과 같으니 변화의 상이다.

<해설> 土는 계월季月이니 변화를 의미한다. 각 오행의 正位는 子午卯酉를 말하는 것이다.

`용왕이 아닌 즉 없다(非龍神則無)`에서 용왕(천둥을 상징함)은 水를 가리키니 용왕이 아니다란 子는 납음이 火이므로 水이면서 火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子水는 한 가운데의 겨울이라 하더라도 동지로부터 일양一陽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렇듯 천둥이나 벼락에 비유한 것이다. 천둥이나 벼락은 비록 엄청난 화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성냥불처럼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것처럼 겨울의 火 역시 만물을 자생할 수 없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만 천둥번개는 잠든 천지를 일깨우며 봄을 알리는 것이니 천둥번개가 치고 구름이 분주하게 몰려와서 비를 내리는 변화를 가져온다는 의미이다.

...<庚寅辛卯松柏木> 木은 寅에서 임관臨官이고 卯에서 제왕帝旺이니 木이 이미 생왕生旺한 즉 유약柔弱하지 않은 도움이므로 송백목松柏木(소나무와 측백나무. 모두 상록수이므로 굳은 절개나 장수를 비유함)이라 한다. 눈이 날리고 얼음이 얼어서 하늘에 닿고 땅을 덮더라도 바람이 채찍질하여 생황을 연주하는 듯 하고 비가 넉넉하여 기旗를 장막 삼는 듯 하다.

<해설> 송백의 진가는 한 겨울에 홀로 그 푸름을 드러내는 것이다. 천간의 庚辛은 아직 음기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니 송백에 비유하여 막 봄이 열리는 꽃샘추위의 시기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庚寅과 辛酉는 어려움을 꿋꿋이 견디며 마지막 시련을 맞이한 상이다. ‘눈이 날리고 얼음이 얼어서 하늘에 닿고 땅을 덮더라도 바람이 채찍질하여 생황을 연주하는 듯 하고 비가 넉넉하여 기旗를 장막 삼는 듯 하다’란 정월(양력 2월)에 만물이 곧 다가올 따뜻한 봄날을 의연하게 맞이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생황을 연주하는 듯하다’란 송백의 가지가 매서운 꽃샘추위 바람에 소리내며 흔들리는 모습으로 다소 지친 모양이고 ‘비가 넉넉하여 기를 장막 삼는 듯하다’란 이 시기에는 비가 넉넉하기 때문에 생명의 근원이 깊다는 뜻이다.

...<壬辰癸巳長流水> 辰은 水庫가 되고 巳는 金의 長生地이니 金이 곧 水를 생하여 水性이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水가 庫에 있더라도 金의 생함을 만나기 때문에 샘의 근원은 마침내 마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긴 흐름(長流: 강의 흐름. 길게 흐름)의 물이라고 한다. 세력이 동남에 거처하며 귀하고 편안하고 고요하다.

<해설> 임진년이나 계사년은 샘의 근원이 깊은 때문에 풍년이 든다는 의미이다. ‘세력이 동남에 거처하다’란 세력은 水를 의미하고 동남은 木火를 의미하니 木火는 양기陽氣이므로 양기가 세력을 얻어서 발전한다는 뜻이다.

...<甲午乙未沙中金> 午는 火旺地가 되니 火가 왕성하면 金은 손상을 입는다. 未는 火의 衰地가 되니 火가 쇠하면 金은 冠帶이나 바야흐로 관대란 아직 쇠를 연마하여 나무를 벨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중금沙中金(砂金: 강이나 바다에 침전되어 모래 속에 섞인 금)이라고 한다.

<해설> 사금을 채취하려면 많은 노력과 경험이 풍부해야 한다. 갑오나 을미는 아직 미약하기 때문에 경륜이 풍부한 웃어른의 도움과 자신의 노력이 절실하다는 의미이다. 연마하지 않은 쇳덩어리에 비유한 것이다.

...<丙申丁酉山下火> 申은 땅의 지게문이고 酉는 해가 들어오는 문이니 해(日)는 이 시기에 이르면 빛은 쓸모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산 아래의 불(山下火)이라고 한다. 酉가 兌位에서 가라앉고 또 東南을 기뻐하니 震에서 밝음(明離)이 나와 그 빛은 더욱 빛나는 것이므로 어둠이 火를 싫어하더라도 밝음은 구제하는 것을 좋아한다.

<해설> 酉는 팔괘의 兌에 해당하고 卯는 팔괘의 震에 해당한다. 丙申과 丁酉는 천간이 丙丁의 火이고 지지가 申酉의 金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지지의 申酉金이 천간의 丙丁火를 싫어한다 하더라도 丙丁火는 申酉金을 구제하려고 하므로 서로가 괴리된 상황이다. 山下火란 잠자는 화산을 의미하니 서로 다투고 있다는 의미이다. 어둠은 申酉를 비유하고 밝음은 丙丁을 비유한다.

...<戊戌己亥平地木> 戌은 들판이 되고 亥는 生木하는 곳이 된다. 대저 나무가 들판(原野)에서 자라면 초목의 한 뿌리나 숲의 어느 하나라도 무리를 짓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평지의 나무라고 한다. 오직 비와 이슬은 돕는 공은 있으나 눈과 서리는 쌓이는 것이 기쁘지 않다.

<해설> 들판에서 자라는 나무는 어느 것 하나라도 군락을 이루지 않는다면 보호막이 없기 때문에 살아남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戊戌과 己亥는 서로 의지하며 共生관계를 유지해야 살아남는 것이다. 그러므로 春夏(비와 이슬)와 같이 서로 화합하는 것은 길하나 秋冬(눈과 서리)과 같이 서로 불합하는 것은 불리한 것이다.

...<庚子辛丑壁上土> 비록 丑이 土라 하더라도 정위正位이고 子는 곧 수왕지水旺地이니 土가 많은 水를 만난 즉 진흙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람벽 위의 흙(벽상토壁上土)이라고 한다. 추위에 생기生氣가 막힌 기氣이니 사물이 저장하는 것을 숭상하므로 형체를 숨겨서 내외가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해설> 진흙은 물기가 너무 많은 때문에 초목이 뿌리를 내리기 어렵다. 진흙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곳은 바람벽(방을 둘러막은 둘레)이다. 바람벽은 진흙이 변화한 것인데 이것은 흙의 본래 기능이 만물의 터전이라는 점에서 볼 때 그 형체를 숨긴 것이다. 그러므로 진흙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달리 방도를 찾아서 변모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壬寅癸卯金箔金> 寅卯는 木旺地가 되니 木이 왕성한 즉 金은 약하다. 또 寅에서 絶地이고 卯에서 胎地이니 金은 이미 무력하므로 금박金箔(금을 얇은 종이같이 늘인 조각)이라고 한다. 木氣가 寅에 있고 金은 絶地가 되기 때문에 얇은 것이 명주와 같아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해설> 금박은 金 중에서 가장 약하고 매우 얇은 것이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木이 왕성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금박(金)은 나무(木)를 벨 수 없으니 약한 세력으로서 강왕한 세력을 이겨내지 못하므로 대세(木)를 따라야 한다는 곡직인수曲直仁壽(從格)를 의미한다.

...<甲辰乙巳覆燈火> 辰은 식사시간이 되고 巳는 한 낮이 되니 해(日)가 정오正午에 나아가서 염양艶陽(晩春의 계절)의 세력이 천하에 빛을 비추므로 뒤집힌 등의 불(복등화覆燈火)이라고 한다. 금잔金盞이 요광搖光(북두칠성의 제 일곱 번째 별의 이름. 빛이 번쩍임을 이름)하고 옥대玉臺(천제가 있는 곳)가 곱고 아름다운 색채를 발산하니 日月이 비춰서 이르지 않는 곳이 없어서 천지가 밝으나 아직 밝은 때가 아니다.

해설> 늦은 봄볕을 의미한다. 비록 늦은 봄의 햇살이 만물을 생육하고 있다 하더라도 여름의 햇살보다 세력이 약한 것이다. 이 속에는 더욱 분발해야 한다는 속뜻이 있는 것이다.

...<丙午丁未天河水> 丙丁은 火에 속하고 午는 火旺地이나 납음은 바로 水이고 水는 火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은한銀漢(은하수)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으므로 천하수天河水(銀漢. 은하수: 강에 비유하여 이름)라고 한다. 氣는 마땅히 승강升降하고 성대한 모양은 장마가 되며 生旺은 사물을 구제하는 공이 있다.

<해설> 午는 하지가 이에 속하고 하지부터 一陰이 발생한다. 이 一陰이 바로 水이다. 이것은 물극필반物極必反을 말하는 것이다. 丙午와 丁未는 火가 극성하나 그 속에는 火가 기우는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丙午와 丁未는 火가 극성하였다가 水로 전환하는 때이고 은하수(강물)에 비유하여 물이 많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戊申己酉大驛土> 申은 坤이 되고 坤은 地가 된다. 酉는 兌가 되고 兌는 澤이 된다. 戊己의 土가 坤과 澤의 위에 더하여 그 외에 불성실하고 경박(浮薄)하지 않으므로 대역토大驛土라고 한다. 氣가 휴식에 들어가고 사물이 마땅히 수렴하였으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해설> 申의 방위는 서남방이고 서남은 坤에 속하기 때문에 申은 地가 되는 것이다. 酉의 방위는 서방이고 서방은 兌에 속하기 때문에 酉는 澤이 되는 것이다. 驛은 ?(두루 역)과 통하고 뜻은 ‘雲氣가 희소한 모양(한어대사전)’이다. 대역토란 뒤에서 ‘기가 휴식하고 사물이 마땅히 수렴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뜻은 ‘크게 운기가 희소한 모양의 흙’일 것 같다. 그러므로 잘 반죽해 놓은 흙과 같이 변모하기에 좋은 시점이라는 의미이다.

...<庚戌辛亥釵釧金> 金이 戌에 이르러서 衰이고 亥에 이르러서 病이니 金이 이미 衰와 病인 즉 진실로 약한 것이다. 그러므로 채천금釵釧金(비녀와 팔찌)라고 한다. 形이 이미 器를 이루고 아름답게 꾸민 것이 빛을 발하니 만족은 生旺에 있고 귀함은 體를 감춘 것에 있으므로 火가 성하여 形을 상하면 마침내 기쁘지 않은 것이다.

<해설> 비녀와 팔찌는 장신구로써 그 자체가 완성품이다. 그러므로 庚戌과 辛亥는 해 오던 일을 완성한다는 의미이다. 金水운은 길하나 火운은 불길하다.

...<壬子癸丑桑?木> 子는 水에 속하고 丑은 金에 속하며 水가 바로 木을 생하고 金이 곧 이를 베어내니 마치 뽕나무와 산뽕나무가 생하는 것처럼 사람 역시 상해한다. 그러므로 상자목桑?木(뽕나무와 산뽕나무)라고 한다. 氣가 빙빙 감돌아 水地에 거처하니 아직 도끼와 칼을 사용하지 못한다.

<해설> 뽕나무는 가지를 베어내어 뽕잎을 채취하며 다시 베어낸 근처에서 줄기가 돋아난다. 壬子나 癸丑은 水가 절정에 이른 것이니 물극필반物極必反이므로 이때 火(一陽)가 생겨나나 아직 겨울이어서 가지를 잘라낸 뽕나무에 비유하여 기다려야 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甲寅乙卯大溪水> 寅은 東旺이 되고 오직 卯는 正東이 되니 正東으로 물이 흐르면 그 성질이 순하고 시내와 골짜기의 연못이 모두 합하여 귀착하므로 대계수大溪水(큰 시냇물)라고 한다. 氣는 陽明(해. 태양. 양기의 밝음을 이름)이 나오고 水勢는 근원을 사용하니 東은 가득 차서 흐르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해설> 東은 木을 가리킨다. `氣는 양기의 밝음이 나오다`란 ‘양기陽氣’라는 의미이고 `수세水勢는 근원을 사용하다`란 겨울의 언 물이 녹아서 흐르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비록 甲寅과 乙卯의 간지가 모두 木의 오행으로 되어 있다하더라도 수세水勢의 근원이 깊다는 의미이다.

...<丙辰丁巳沙中土> 수고水庫가 辰에 있고 (壬의) 절지絶地가 巳에 있으며 천하의 丙丁火가 辰에 이르러 관대冠帶가 되고 巳에 이르러 임관臨官이 되니 土는 이미 고절庫絶이 되더라도 왕성한 火가 부흥하여 이를 생하므로 사중토沙中土(모래 속의 흙)이라 한다. 土가 氣를 트이게 하므로 마땅치 않은 것이다.

<해설> 모래 속의 흙은 불순한 物質로서 순수함을 잃은 것이다. 순수하지 못한 것은 발전이 더디고 혼란한 모습이니 이는 질서를 바로잡아야 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모래(丙丁火)와 흙(土)이 혼잡한데 土가 火의 순수성을 훼손한 것이다.

...<戊午己未天上火> 土는 화왕지火旺地가 되고 未 가운데의 木은 또 火를 다시 생하니 火性은 불꽃을 일으키며 급기야 土가 生地를 만나므로 天上火(하늘 위의 火)라고 한다. 氣는 양궁陽宮이 지나쳐서 거듭 상회相會할 수 있으니 병령炳靈(밝은 신령의 위엄. 또, 신령의 위엄을 밝힘)이 빛을 주고받으며 불꽃을 발하고 하늘 위로 오르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해설> 火가 극성極盛한 염상炎上을 나타내는 것이다.

...<庚申辛酉石榴木> 申은 칠월이고 酉는 팔월이 되니 이 때의 木은 곧 절지絶地이다. 오직 석류나무만이 열매를 맺으므로 석류목石榴木이라 한다. 氣는 정숙靜肅(고요하고 엄숙함)하고 만물은 점점 결실을 맺어가니 木이 金이 그 맛을 生하는 시기에 거처하여 가을이 과실을 이루므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해설> 석류나무는 가을의 결실을 비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金氣가 왕성한 시기를 나타내는 것이다. 금기는 결실과 수렴을 상징하는 것이다.

...<壬戌癸亥大海水> 水는 戌에서 冠帶이고 亥에서 臨官이니 水는 곧 역량이 두터운 것이다. 겸하여 亥는 江이 되어 다른 水와 견줄 수 없으므로 대해수大海水라고 한다. 세력은 대문으로 향하고 역사歷事(歷仕: 두 대 이상의 임금을 섬김)는 이미 마쳤으며 生旺하나 범람하지 않고 死絶이나 마르지 않으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해설> 대해수大海水란 큰 바닷물을 비유하는 것이고 수기水氣가 왕성한 시기를 나타내는 것이다.

...<甲寅乙卯大溪水> 寅은 東旺이 되고 오직 卯는 正東이 되니 正東으로 물이 흐르면 그 성질이 순하고 시내와 골짜기의 연못이 모두 합하여 귀착하므로 대계수大溪水(큰 시냇물)라고 한다. 氣는 陽明(해. 태양. 양기의 밝음을 이름)이 나오고 水勢는 근원을 사용하니 東은 가득 차서 흐르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해설> 東은 木을 가리킨다. `氣는 양기의 밝음이 나오다`란 ‘양기陽氣’라는 의미이고 `수세水勢는 근원을 사용하다`란 겨울의 언 물이 녹아서 흐르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비록 甲寅과 乙卯의 간지가 모두 木의 오행으로 되어 있다하더라도 수세水勢의 근원이 깊다는 의미이다.

...<丙辰丁巳沙中土> 수고水庫가 辰에 있고 (壬의) 절지絶地가 巳에 있으며 천하의 丙丁火가 辰에 이르러 관대冠帶가 되고 巳에 이르러 임관臨官이 되니 土는 이미 고절庫絶이 되더라도 왕성한 火가 부흥하여 이를 생하므로 사중토沙中土(모래 속의 흙)이라 한다. 土가 氣를 트이게 하므로 마땅치 않은 것이다.

<해설> 모래 속의 흙은 불순한 物質로서 순수함을 잃은 것이다. 순수하지 못한 것은 발전이 더디고 혼란한 모습이니 이는 질서를 바로잡아야 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모래(丙丁火)와 흙(土)이 혼잡한데 土가 火의 순수성을 훼손한 것이다.

...<戊午己未天上火> 土는 화왕지火旺地가 되고 未 가운데의 木은 또 火를 다시 생하니 火性은 불꽃을 일으키며 급기야 土가 生地를 만나므로 天上火(하늘 위의 火)라고 한다. 氣는 양궁陽宮이 지나쳐서 거듭 상회相會할 수 있으니 병령炳靈(밝은 신령의 위엄. 또, 신령의 위엄을 밝힘)이 빛을 주고받으며 불꽃을 발하고 하늘 위로 오르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해설> 火가 극성極盛한 염상炎上을 나타내는 것이다.

...<庚申辛酉石榴木> 申은 칠월이고 酉는 팔월이 되니 이 때의 木은 곧 절지絶地이다. 오직 석류나무만이 열매를 맺으므로 석류목石榴木이라 한다. 氣는 정숙靜肅(고요하고 엄숙함)하고 만물은 점점 결실을 맺어가니 木이 金이 그 맛을 生하는 시기에 거처하여 가을이 과실을 이루므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해설> 석류나무는 가을의 결실을 비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金氣가 왕성한 시기를 나타내는 것이다. 금기는 결실과 수렴을 상징하는 것이다.

...<壬戌癸亥大海水> 水는 戌에서 冠帶이고 亥에서 臨官이니 水는 곧 역량이 두터운 것이다. 겸하여 亥는 江이 되어 다른 水와 견줄 수 없으므로 대해수大海水라고 한다. 세력은 대문으로 향하고 역사歷事(歷仕: 두 대 이상의 임금을 섬김)는 이미 마쳤으며 生旺하나 범람하지 않고 死絶이나 마르지 않으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해설> 대해수大海水란 큰 바닷물을 비유하는 것이고 수기水氣가 왕성한 시기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미란님의 글>

댓글()

임신성 당뇨의 원인에서 생각하는 육친논리

명리동네 이야기|2022. 4. 23. 17:46

임신성 당뇨의 원인에서 생각하는 육친논리

헤이그의 논지는 모체와 아기는 기본적으로 자손의 번식이라는 목표를 위해 협력하고 있지만(모체가 자녀의 양육과 보호에는 놀랄 만큼 이타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 사이에는 공통된 유전적 이해관계뿐만이 아니라 상호대립의 유전적 야심도 존재한다. 모태의 이타주의 이면에는 이기성만을 기준으로 하는 모체만의 유전자가 숨어 있다.

모체가 임신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이유는 태아가 그녀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해 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아가 모체의 생존을 바라는 이유는 모체가 죽으면 자기도 죽을 것이므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체의 이익과 태아의 이익이 일체를 이루지 못한 경우에는 모체는 출산 후에도 살아남기를 원하며, 반면 태아는 모체가 자기에게 마지막 생명력까지 투여해주기를 바란다.

만약, 둘 중의 어느 하나가 살기 위해 다른 하나가 희생되어야 한다면 각자는 서로 생존자가 되기를 본능적으로 원한다. 93년 헤이그는 태아의 태반이 모든 측면에서 모체의 협력자가 아니라 교묘한 내부 기생체로서 행동하며 모체에게 자신의 이익을 강요하려 한다는 발견을 하였다.

모체의 혈액을 태반에 공급하는 동맥 속으로 태아의 세포가 침입해 동맥벽에 자리 잡고 그곳의 근육을 파괴함으로 그 동맥을 수축시킬 수 있는 통제력을 모체로부터 박탈하는 것이다. 드물지 않은 임신 합병증인 고혈압과 자간전증은 이와 같은 태아의 조종으로 일어난다. 이는 태아가 모체의 신체조직과 혈류를 감소시키는 호르몬을 방출해 모체의 혈액을 자기 쪽으로 더 많이 끌어오려고 하는 노력에 따른 결과이다.

혈당을 둘러싸고도 마찬가지의 투쟁이 벌어진다. 임신의 마지막 석달 동안에 모체는 대개 안정된 혈당량을 유지하지만 사실 이기간 중에 인슐린의 생산량은 날마다 증가하고 있다. (인슐린은 혈당량을 낮추는 작용을 하는 호르몬이다.) 이 같은 패러독스의 이유는 태아의 조종을 받는 태반이 초유호르몬이라는 hpl 호르몬의 생산량을 매일 증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hpl은 인슐린의 작용을 억제하는 호르몬이다.) 모체와 태아가 서로 상반된 기능을 가진 호르몬을 오로지 서로를 상쇄할 목적으로 생산해내는 것이다. 이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 헤이그에 따르면 영양 공급원인 모체혈액의 혈당량을 증가시키려는 욕심 많은 태아와 혈당을 태아에게 너무 많이 빼앗기지 않으려는 알뜰한 모체 사이의 줄다리기가 일어나고 있는 때문이다. 이 싸움의 결과로 일부 여성은 임신성 당뇨에 걸리게 된다. 이는 태아가 줄다리기에 너무 많아 이긴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이다. 태아가 생산하는 hpl호르몬은 아버지 쪽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에 의해 생산된다. 태아는 모체에 심어진 아버지의 기생체와 같다.

"이기적 유전자 이론의 개척자인 해밀턴과 로버트 트리버스는 부모와 자식, 부부, 동료들 간의 관계는 상호충족 관계가 아니라 그 관계로부터 이익을 취하려는 상호 투쟁 관계라고 주장한다."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중에서>

......................... 여자의 사주에 있어 식상이나 재성이 기신이 되고 있다면 이러한 유전자적인 투쟁의 내용까지 참고삼아 궁구해 볼 필요가 있다. 명리는 지극히 현상적인 원인을 궁구하는 현상학인 까닭이다.

흔히들 식상은 여자에게 자식이라 말하고 있다. 이는 내가 힘을 쏟는 것이다. 하지만 식상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현상을 위한 이면적인 의식에서 작용하는 힘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팔자의 육친 표출에서 현상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은 일간이 그 뿌리를 두는, 실질적인 활동의 바탕으로서 작용하는 재성이다. 이 재성을 중심으로 이면적인 작용으로서의 식상과 현상적인 경쟁작용으로서 사회적인 면이 되는 관성이 어울리게 된다. 여기서 식상이 실현하는 것은, 존재를 드러내려는 의식 구현력 자체이며, 관성이 구현하는 것은, 존재의 경쟁적인 면에서의 성립이 된다. 경쟁적인 성립은 존재의 사회적인 인정으로서 정리정돈, 문서, 명예 등의 의미가 소속되어 있는 인성에 연결이 된다.

인성은 어머니라는 의미가 주로 인용되는 육친 성으로, 어머니가 자식을 출산하는 것은 하나의 성립된 개체가 또 다른 개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출산으로 드러낸 모습 자체가 또 하나의 개체에 대한 인정이다. 그래서 인성이다. 이 순환과정에서 때때로 생산의 성립이 저해되는 모습으로 임신에 따른 유산을 들 수 있다. 이 부정적인 요인으로서의 내부적인 면은 식극 관으로, 양육에 따른 외부적인 면은 재극 인의 관점을 주로 삼아 상고할 필요가 있다.

"이기적 유전자 이론의 개척자인 해밀턴과 로버트 트리버스는 부모와 자식, 부부, 동료들 간의 관계는 상호충족 관계가 아니라 그 관계로부터 이익을 취하려는 상호 투쟁 관계라고 주장한다."

위의 글이 보여주는 내용은 육친논리로 바로 이해가 닿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댓글()

팔자 육친 흐름의 대강, 비견과 겁재

명리동네 이야기|2022. 4. 14. 06:12

팔자 육친 흐름의 대강, 비견과 겁재

일반적으로 팔자의 육친 성을 논함에 우선으로 비견을 논한다. 비견에 대한 설명의 일반은 자기 본위 적이며 독립, 독보적이라 타의와의 협조나 협동심을 드러내기 어려운 성정이란 내용의 정리에 머물고 있다. 이는 비견 성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주는 양질의 전달이 되지 못한다. 우선 사주의 일주에 있어 비견 성의 존재가치와 그 상태는 자기 의지력의 정도를 논함과 아울러 의지로 단련된 개성표현의 산실이 됨에 있다.

비견이란 글자의 뜻대로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의미이다. 이 개념의 함의는 지향하는 목표를 향한 부단한 의지로서 목표치에 있는 대상과의 어깨를 나란히 함에 있다. 이를 단순하게 형제, 친구, 동년배 등을 칭하는, 동격을 논하는 내용에만 초점이 치우친 설명은 사주 육친 성에 대한 그 사고의 깊이가 대체로 조잡해질 수밖에 없다.

비견은 어떤 목표치를 바라보고 그 품격을 표출하는 대상과 자기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의지이다. 그런 마음이면 그 의지가 자주적이며, 자존적이어야 함은 당연하다. 자기 의지가 주변의 군중심리에 수시로 무작정의 동조를 하고 마는 상태이고서는 어떤 이가 어떤 분야를 지향하든 개성이 담긴 자존감이 타협이 일상인 주변에 드러나기 어렵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비견의 성정은 일반적인 수용이 점철되는 생각의 흐름에 협조, 야합하여 그 테두리 속에 안주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자주성은 자기관리를 수용하는 것으로서, 그 뒷심의 의미가 되는 정관의 역할이 동반되어야만 한다. 그 동반의 결과가 사회를 주도하는 특별한 개성에 상정되어 받아들여지게 되며, 여기에는 아울러 그 개성의 무게를 감당할만한 감수성이 인식의 뿌리에서 행사되어야 한다. 그 뿌리로 자리하는 의미가 식상이다. 이렇게 갖추어진 비견의 성정이 목표치의 대상과 그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는 것이다.

실로 비견이 견지하는 개성은 어깨동무란 정겨운 느낌에 맞닿아지게 표현된 단어의 어감처럼 자타의 정당성이 마련된 방식을 통한 자수성가를 이루어 내려는 자아성취에 충실한 자존감이 담긴 정신에서 비롯된다. 때문에, 그 성정은 형제, 친구, 동료 등에게 발전적인 기대감이 형성되어 가면서, 주변의 인정과 호응하에 의리가 담긴 협조를 이끄는 특징이 있다.

반면에 이기적이란 표현을 담아내기에 딱 들어맞는 팔자 육친의 그릇이 겁재이다. 겁재는 비견의 동체 이면이다. 겁재의 성정이 겉으로 드러내는 행위는 비견이 드러내어 보이는 행위와 별반 다름이 없이 보인다. 그러나 그 속마음은 비견이 가진 상대적인 행위의 순수성을 아예 던져버리고 있다. 겁재는 바로 위선의 대명사인 것이다.

겁재의 성정은 언제나 동상이몽에 젖어 있다. 그 속절없는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서 그 연출된 껍질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하는 말을 실감하는 것은 시간문제가 된다.

동체의 이면인 비견과 겁재가 그 활동의 뿌리를 두는 바탕이 되는 육친 성은 재성이다. 여기서 뿌리를 둔다는 것은 오행의 상생, 상극 중에서 극에 해당하는 의미이다. 이를 잠시 부연하면 상생이란 무엇이 무엇을 살리고, 상극이란 무엇이 무엇을 깨어 부순다는 가소로운 인식의 선상에서 생, 극의 의미를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생극은 음양의 의미와 같이 이면 동체의 구성이다. 무슨 나무가 불을 생 한다는 말인가? 나무는 연소재다. 연소재가 불타기 위해서는 산소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불을 생 하는 것은 나무인가, 산소인가? 연소재인 나무는 오행의 음양으로 음목(陰木)이요, 불에 활기를 불어주는 산소는 양금(陽金)이다. 이 합일이 불이 타오르게 되는 생, 극의 사실이다. 단순히 극만을 논한다고 해도, 도끼로 장작을 패는 행동과 조각가가 나무를 칼로 조각하는 행위가 본질에서는 다르지 않다. 하지만 다듬어진 시선이 요구되는 세상에서는 분명히 다른 것으로 인식된다. 이 시선 속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바탕을 가꾸고, 분탕질하는 비견과 겁재의 경우를 편집하여 살펴보는 것을 시작으로 전해지는 경험칙 전달의 요령습득에 연연하기보다, 팔자 육친 인식의 진폭이 자리하는, 인생 공부의 본연을 느낄 수 있는 장(場)으로서 팔자의 육친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댓글()

명상과 기도에 대한 소회

오늘 한 생각|2022. 4. 12. 11:45

명상과 기도에 대한 소회

많은 이들이 명상에 관심을 가지고 그 효과적인 방법을 찾고들 있는 것 같다. 아울러 그 신봉하는 종교에 따른 신을 향한 기도를 선호하는 이들은 그야말로 부지기수이다. 하지만 이 양면으로 흐르고 있는 정신의 여정을 펼치는 나라는 바탕 면에 무엇을 우선하여 안착시켜야만 하는가에 대한 개념의 염두는 대체로 없는 것 같다.

   기도는 명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명상이든 기도이든 그 행위의 시발을 이루는 그 바탕에 대한 자각을 등한시하고서는 원하는 대상에 대한 시각화를 이루어내기 어렵다.

본질적인 기도는 자기를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자기인식은 명상의 완성이며, 그 시점으로부터 진짜 기도를 할 수 있게 된다. 명상이 무색한 기도는 그 효용을 여실히 확인할 수가 없는 어둠 속을 더듬는 손짓에 불과하다. 이 일련의 순차를 통하여 우리 내면의 신실한 작용을 확인하고, 그 활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때문에 기도의 요건이 성립되는 명상에 대한 직시를 먼저 열어둘 필요가 있다.

명상의 주체는 자기의식이다. 그 핵심은 자기 생각이다. 그것은 제멋대로 일어나는 잡념과는 거리가 멀다. 생각은 깨우침의 생성이다. 깨우침은 어떤 문제에 대한 개념을 사유하고, 합리가 부합되는 자리에서 드러난다. 우리 생활 속의 작은 깨우침에 더불어 과학자가 어떤 원리를 연구하고 그 현상에 부합되는 이해의 장이 생각이며, 시인이 어떤 현상적인 모습에 대한 의식적인 절묘한 개념의 환치를 표현하여 많은 이들의 의식에 그 빛의 동조를 일으키는 인식의 깊이가 생각의 모습이다.

잡념에 휩쓸리지 않은 생각은 의식의 빛이다. 이 빛은 전등 불빛처럼 단순히 밝음을 표현하는 광(光)이 아니다. 어두운 방 안에 전등이 켜지므로 그 방의 상태와 모습이 보이듯이 상(想)으로 표현되는 어떤 구체적인 영상(映想)이 드러난 상태의 빛이다.

흔히 명상이라 이름하는 사유행위를 지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리 뒤쪽으로부터 전해지는 순간적인 자극을 느끼며, 그 사유로 비롯되는 어떤 상을 보게 된다. 이 상(想)은 꿈을 꾸는 상태와는 구별된다. 꿈으로 보는 환상은 현실의 경우와 같이 내가 그 공간 속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이 상태는 영화를 보는 모습과 같이 머릿속에 떠오른 스크린을 나 자신이 관객으로서 바라보게 된다. 이 스크린이 떠오른 상태를 엄연히 명상(瞑想)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의식이 순일해진 상태로 떠올린 스크린 속에 신봉하는 신을 등장시켜서 나의 의식을 개진할 수 있는 기도가 행하여질 수 있다면, 왜! 기도에 앞서 명상이 선행되어야 하는지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명상이 선행되지 못하는 대부분이 발하는 기도는 그 정성을 논하기에 앞서, 엄밀히 잡념의 유희에 불과하다.

우리 주위에는 명상하는 방편으로서 여러 가지 방법들이 산재하고 있다. 종교적인 내용의 염이나 묵상, 그리고 그 이외의 어떤 방법들을 막론하고 그 지속적인 행위를 통하여 명상적인 의식의 스크린을 열고, 신의 눈빛이 제대로 감각될 수 있는 기도가 두루 행해졌으면 하는 생각이 짙다.

댓글()

숙명과 운명의 조우

오늘 한 생각|2022. 4. 11. 09:38

숙명과 운명의 조우

사주팔자는 전 후면을 윤회하는 뫼비우스의 노선처럼 인생 생멸의 윤회를 전제로 한 구성이다. 윤회는 숙명이란 문제를 던진다. 태어난 시점의 사주팔자로 대변될 수 있는 숙명은 세상 삶이란 경주가 시작되는, 빈부귀천이 지정된 자기 출발선이 된다. 운동회의 경주와는 달리 각기의 인생이 출발하는 선상이 평등하고 공정한 것 같지가 않다는 다분한 생각에서 던져지는 문제이다.

인생의 행로가 빈부귀천으로 정해진 출발을 하는 부정한 모양이 하늘이 내려주는 세상의 원리라면 삶을 위한 의지를 담은 노력과 그 독려의 의미는 굳이 무슨 소용인가? 삶에 대한 별다른 생각에 의미를 담지 않고 살아도 그저 타고난 귀천의 행로를 따라 흐르는 것이 인생의 원리라면, 우리의 삶이란 행위에서 오는 발전적인 느낌들의 인식 가치를 주고받으려는 세상의 고무적인 노고들 역시 결과적으로 허무한 것으로 치부돼야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하늘이 숙명으로 내려주는 그 공정함은 이솝의 우화 속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이야기를 통해서도 단적으로 언질이 되고 있다. 거북이의 노력에 따른 결실과 토끼의 자성이 요구되는 것, 이는 하늘이 인생을 흐르게 하는, 숙명의 공정함을 말하는 이야기들의 하나인 것이다. 여기에 자성은 무색하고 타성적인 반감만을 드러낸다는 것은 알곡이 못 되는 무위도식하는 쭉정이에 불과할 뿐이라는 반증이 된다.

행여 누군가가 걸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라도 그 생각 속에 자신의 처지가 주어진 자기 이유가 각성이 되고 있다면, 그는 무위도식자가 아닌 이미 당당한 세상의 일원이다. 숙명의 환골탈태는 죄수의 형기와 다름이 없다. 깨달음만으로 그 주어진 업을 단숨에 가뿐하게 털어낼 수는 분명히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깨달음 역시 그 선상의 최선이 아닐 수 없다.

숙명은 운명의 마중물이다.

숙명은 남녀가 연분을 만남같이 운명을 맞아들인다. 운명은 숙명이란 마중물에 섞여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콩을 심은 곳에 콩이 나고, 팥 심은 곳에 팥이 나지만 그 소출의 크기는 숙명의 질과 크기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변할 수 없는 것은 숙명과 운명이 맞물리는 크기이고, 변할 수 있는 것은 그 맞물리는 질적인 면이다. 살면서 느낌 받는 자기인식을 되짚어 보고 살피는 의식적인 노력이 숙명에 맞물리는 운명의 질을 개선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만남일지라도 성경의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와 같이 운명(運命)은 맞이할 준비라는 변수를 동반하고 있다.

이 만남의 크기는 당연하게 돈복이다. 물류를 대표하는 돈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 물류들을 바라보는 눈이 밝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인식의 복을 자기가 닦은 내용의 크기이므로 돈 많은 이가 다만 인색하다는 이유로 시기나 질시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 돈복은 물류를 바라보는 눈이 밝으면 그만으로 이어지는 것일 뿐, 그 심성의 선악을 가리지 않는다. 다만 한가지 돈 자랑하는 부자를 본 적이 없는 것처럼, 자랑을 일삼는 돈은 한때 졸부의 쌈짓돈일 뿐이다. 돈 자랑은 금물이지만 자기인식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그 숙명의 운명적인 성과이다. 여담이 되지만 “달마”란 인도의 스님이 “양무제”라는 왕을 만나서 그 왕이 자신의 물질적인 업적의 평가를 물었을 때, “아무런 공덕이 없다.”는 대답을 남겼다는 일화는 물질은 자랑하는 순간 아무런 의식적 성과도 남지 않는다는 분명히 내포하고 있다. 의식이 발하는 의미로는 이 우주를 담을 수 있다지만 아무리 큰돈이라 한들 참으로 본질적인 면에서 걸인의 깨달음이 밟고 지나간 발자취에도 미칠 수가 없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 삶이 펼쳐지는 세상이 몸짓만의 운동장이 아닌 의식이 살아가는 영적 세계의 한 단면인 것이 아쉬운 현실을 관망하는 속에서 또렷하게도 느껴지고 있다.

당면한 현실 속에서 많은 이들이 자기 존재가 점하여 온 확인할 수 없는 숙명을 부정하고, 그 맞물리는 운명이 주는 의미를 야심 찬 심정으로 부정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다만 그 인식이 전개되는 과정의 산물일 수밖에는 다른 콧대 높은 어떤 의미가 별달리 용납될 자리는 없다는 생각이다.

불교의 교조인 부처님 역시 오백 생이란 숙명의 습지를 구르는 윤회를 극복하고서야 생멸의 궁극에 이르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삶이란 숙명과 운명의 조우로 빚어지는 자기인식의 양면이 스스로 충돌하는 재난 극복의 훈련장이 아닌가 한다. 이 훈련장을 표식하는 상징이 팔자이며, 팔자는 바로 태극의 속살임을 확인할 수 있다.

댓글()

마음에도 몸이 있다.

오늘 한 생각|2022. 4. 10. 05:21

마음에도 몸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의도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의도는 본능적인 의도와 의식적인 의도로 구분이 되는 두 가지의 의도가 있다.

의식적인 의도는 각성에 의한 것이며, 본능적인 의도는 형성된 습관에 의한 것에 해당한다. 이 두 가지의 의도 중, 마음은 습관적인 부분으로 형성된 습관성 자체가 발하는 고착된 또 하나의 의식이 곧, 마음이다.

습관은 집착이나 집중의 반복 행위가 중첩됨에 따라 생성이 된다. 생성된 습관은 특정의 프로그램과 같은 것으로 집착이나 집중의 내용에 따라 기의 구성이 응집하여 형성된 기질 체로 발현하게 된다.

이 기질 체는 독자적인 본능을 행사하는 나라는 의식 이면의 자아로 자리를 하게 되면서 그 추구하는 성향을 뚜렷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습관성 자체를 발현시킨 의식의 현재 인식이 발하는 자기 형성과 행위에 대하여 자의적인 간섭을 하게 된다. 이것이 자기의 현재 의식에도 혼란을 주는 특정의 나를 규정하고 그 고착성을 은연 중에도 표현하는 주범이 되는 것이다.

이는 의식적으로 욕망하는 관념이 반복적으로 짙어지면 그 관념에 따른 기질 체가 형성된다는, 우리의 의식이 펼쳐지는 원리 중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형성된 관념의 체는 그 관념을 구체적인 기질로 발현시킨 의식의 현재와는 독자적인 이면의 자의식으로서 그 갈망이 자리 잡은 욕망의 내용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기질 체를 형성하고, 그 의도를 자기의 존재가치로 삼고서 분명하게 행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그 형성된 성향이 부합하는 점에 따라서만 맹목적인 발동을 할 뿐이다. 이 습관성이 발하는 의식 이면의 의식을 그 마음이라 하며, 그 기질적인 본체를 혼이라 이름하며, 현재 의식의 본질인 영과 상하 구분을 둔 것이 영혼의 체계이며, 우리가 인식을 견주는 우리 세계의 모습이다. 

고착된 임의의 체인 혼의 인식이 발하는 고지식한 의도는 그 본질이 그 인식을 발하게 하는 영 의식의 필요에 따른 도구에 불과한 것이나, 부모가 자식을 제어하지 못하는 모양새와 같이 자기 각성이 미흡한 의식이 그야말로 상황에 따른 도구에 불과한 혼 의식의 자기방어에 대체로 휘둘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가 맞닿아 있는 모습이며, 우리의 세상만사이다. 

소설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요괴와 대적을 하며 상황에 따라 변신을 일으키는 그 모습 하나하나가 영 의식이 필요에 따라 때때로 드러낸 혼이며, 그 혼을 손오공은 적시에 적절한 제어를 하고 있지만 우리는 대체로 그 개개의 혼 의식에 도리어 빠져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 속이다. 

혼은 마음으로 자기 생김새를 표현하며, 그 마음의 몸이 바로 혼이다. 물론 한국 혼은 우리가 이 세상을 벗어나지 않는 한 이 땅의 국민으로서 절대로 지켜야 할 혼에 해당한다. 이것은 우리의 국민적인 가치의 전승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렇다. 

댓글()

얼굴 가려움과 여드름에 간단하지만 효과 만점인 과산화수소수

유용한 정보|2022. 4. 9. 09:28

얼굴 가려움과 여드름에 간단하지만 효과 만점인 과산화수소수

 

얼굴에 심한 가려움을 느끼거나 심상치 않은 여드름 증상에 만만하고 간단한 것 같지만 만점의 효과를 보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일반적인 소독약으로 흔히 쓰이는 과산화수소수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과산화수소수는 동네 어느 약국에서나 쉽게 구입할 수 있을뿐더러 그 가격마저도 무척이나 싸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이 만만하게 보이는 녀석을 10배의 생수로 희석을 한 다음, 약솜에 적셔서 잠자기 전에 얼굴에 고루 바르고 자기를 일주일쯤 반복을 하게 되면 얼굴 피부의 가려움증이나 여드름이 나을뿐더러 피부까지 윤택해지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참으로 간단하게 경험할 수 있다.

주의해야 할 점은 눈썹에는 바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눈썹이 빠지게 되거나 색깔이 변색이 되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산화수소수는 자극이 없는 무독성의 소독약으로 표시되고 있기에 그 외의 다른 부작용은 없다고 한다. 본인도 예전에 어떤 번민으로 의욕이 무심한 게으름에 빠져 한동안 잘 씻지도 않고 지낸 적이 있었다. 그런 중에 얼굴에 가려움증이 일어나, 간단한 방법에 이끌려 사용해본 경험에서 억지스럽게 확실한 부작용을 한 가지를 내세운다면 며칠 새에 가려움증이 사라졌다는 것뿐으로 다른 부작용은 없었다. 

이 소독약 요법의 출처는 오래전에 번역 출판되었던 일본의 유명한 민간요법 백과 서적이다. 그 서적의 내용 중에 한가지로, 행여나 누군가 필요를 느낀다면 가벼운 것인 만큼 그다지 부작용에 대한 염려는 덜어놓아도 될 것 같다. 

댓글()

임신신 산욕열 후진통의 예방과 폐결핵에 놀라운 효력 결리차

유용한 정보|2022. 4. 9. 02:00

임신신 산욕열 후 진통의 예방과 폐결핵에 놀라운 효력 결리차

 

결명자와 이질풀을 같은 양으로 끓여서 차와 같이 음용을 한다.

끓일 때의 용기는 금속제는 피하고 도자기약탕관이나 뚝배기 등을 사용한다.

결명자는 초결명의 열매를 말한다. 초결명은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막론하고 약효는 같다고 한다.

초결명에는 에모진이란 성분이 있어서 이의 약성이 독소의 소멸과 혈액을 정화하므로 그에 따른 열을 내리게 하는 작용이 탁월하다는 것이다.

폐결핵 환자에게는 어떤 약보다 놀라운 효력이 있다고 하는데, 폐결핵의 미열은 결핵균의 독소에 의해서 발생을 하므로 에모진의 약성이 그 살균과 혈액을 정화하는 효과 때문이라 한다.

아울러 늑막염이나 복막염에도 결명자, 이질풀의 조합은 그 효과가 특별하다고 한다. 그리고 위궤양이나 위암에는 앞의 조합에다 갯상치(번행초)를 함께 끓여서 복용하면 그 효과가 현저하다는 것이다.

상습변비에는 결명자를 달여서 하루 2회 정도 복용하면 대체로 그 다음날부터 변통이 된다.

결명자가 변통에도 효과적인 것은 장의 연동 기능을 상승시키는 효능에 더불어 그 살균력이 장내 기생충과 그 독소 등에 의한 이상발효를 해소하는 효과 때문이라는 것으로 장내의 독소가 해소되면 그 독소가 혈액에 흡수되는 것이 예방되므로 정화된 혈액이 뇌를 비롯한 여러 장기를 건강하게 할 것은 당연하다. 이에 변비로 인한 혈압상승 역시 변통이 감퇴하는 효과 때문에 뇌 자체의 병이나 뇌압으로 인한 눈의 질병 등에 두루 효과가 있게 됨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결명자의 효능인 장의 연동 기능 향상은 오장에 두루 관계하는 것으로 변통만이 아니라 신장의 이뇨작용까지 원활하게 하는 까닭에 손발이 붓는 현상을 다스리게 된다는 것인바, 이를 종합하면 변통, 살균, 혈액 정화, 이뇨 등이다. 이는 임산부에 있어 체내에서 건강한 아기를 기르는 육체적인 필요조건이 된다.

이질풀 역시 그 이름처럼 이질이란 세균성 질환에 살균효과를 보이는, 항산화작용으로 면역력 강화를 돕는 물질인 타닌과 케르세틴이란 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는 약초로서 이질은 물론 변비, 소염, 대하증, 위궤양 등에 사용하고 있다. 결명자가 이질풀과 조합을 함으로 배가되는 작용도 중요하지만 결명자의 발산작용에 상호보완을 하게 되는, 지사제로 사용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수렴의 성질을 이질풀이 가진다는 것이 두 가지를 조합하는 이유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보다 중요하다.

결명자와 이질풀을 같은 양으로 하여 양에 따라 적당하게 물을 붓고, 물이 끓고 30분정도를 충분하게 끓여서 이를 생각나는 대로 보리차 마시듯이 수시로 마시게 되면 등등의 증상이 있는 일반인은 물론 임산부의 부가적인 고통인 임신신을 다스리는 것에 이어 출산을 순조롭게 할뿐더러 출산 후의 산욕열이나 자궁의 회복을 원활하게 하여 후진 통을 완화하는 작용이 탁월하다 한다. 이를 단순하게 결리차라 이름 지어 본다.

이 민간요법이 제시된 것은 1930년에 이미 일본의 문부성에서 사회 양서로 인정받은 赤本이란 책에서 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의사이면서 민간요법을 체험적으로 연구하는 실학적인 자세를 견지한 인물로서 책의 내용 중 한 가지도 허투루 된 내용이 없음을 드러내고 있으므로 그 경험치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것 같다. 그리고 이 내용을 담은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 출판된 87년 당시에 일본에선 1600판을 넘어서 성경보다 더 많이 팔린 가정 필독서로 취급되었다는 소개를 하고 있는 사실로 봐서 지금은 거의 3000판에 가까울 것으로 추측을 하며, 아울러 일본이 세계 최장수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이는 이유를 알 것 같은 양질의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

댓글()

반야심경의 오온과 사주 육친의 대비

오늘 한 생각|2022. 4. 8. 11:46

반야심경의 오온과 사주 육친의 대비

관자재보살의 가르침인 반야심경에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란 구절이 있다. 이는 살펴보니 오온이란 것이 모두 그 정형이 없는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불교적인 지식으로 오온(五蘊)은 사람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로서의 색수상행식(色, 受, 想, 行, 識)을 말한다. 그리고 그 열거된 차례를 따라 물질, 느낌, 생각, 행동, 인식이라는 약식 설명이 뒤따르고 있다. 
물론 이 오온이 공하다는 관세음보살의 각성을 물리학의 원자론에 빗대는 등으로 각색한 약간은 풀어진 것 같은 내용 설명들이 여기저기서 팔을 휘두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반야심경의 내용은 조견을 하니 오온이 공하다는 상승의 집중을 통한 경험적인 사실을 관자재보살께서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 지혜 제일인 사리불과 같이 요약된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소양(素養)을 전제(前提)로 하여 밝히시고 있는 내용이 된다. 하지만 이 가르침을 접하는 모든 이들의 소양이 그와 한결 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내용의 보편적인 이해를 도모하는 설명에 있어서 그 사용된 단어들에 대한 지식적인 의미와 산스크리트 원문에 대한 음역과 의역의 구별 등을 주지(周知)시키는 것만으로는 2%가 아닌 98% 부족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이의 설명은 관자재보살께서 설한 각성을 옮겨 말하기보다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리자의 소양(素養)에 초점을 두고 조명을 함이 보다 와닿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사리자(舍利子)의 소양에는 분명히 관자재보살께서 각성한 현상 이면의 근본 자리인 제법공상의 경험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유추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상과 그에 반하는 이면 지식의 접점이 작용하는 바를 이해하려는 사유의 축적이 사리자의 소양에 내재 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한마디로 사리분별(事理分別)이 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상적인 오온에 대한 유연한 분별도 없이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그 근본적인 실상의 표현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그야말로 앵무새를 향한 뇌까림에 불과할 뿐이다. 이렇게 다만 인쇄되는 뇌까림이 인식하는 이해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우선 오온이란 단어의 인지에 있어서 ‘사람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라는 인식부터 다시금 정리할 필요가 있다.

사람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라는 말은 사람이란 내용이 마치 다섯 가지의 비활성 성분으로 구성된 단순 물질로 정리된 느낌이 강하다. 

사람이란 내용의 본질은 나라는 현실에 대한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에 걸맞게 그 존재적인 체계가 구성되는 것은 현상적으로 당연하다. 그 구성체계가 오온이란 말로 표현된 것으로, ‘오온’은 사람이란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의미 요소가 작용하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이 시스템이 강조돼야 마땅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보다 입체적인 이해를 도모하는 방편으로 불교적인 내용에서 잠시 벗어나도 그다지 무리한 생각의 발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오온, 즉 색수상행식은 사주학의 육친논리와 그대로 대응(對應)이 된다.

먼저 색(色)은 사주 육친 흐름 중의 재성과 대응하는 것이다. 이는 현실에 직접 작용하는 사람의 육신과 행동을 말한다. 재성은 나라는 인식이 자리하는 기준점이 되며 이 방점(傍點)을 중심으로 의식적인 호불호의 느낌을 받아들이고 표현하게 된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인식이 오온의 수(受)이고, 수는 사주 육친의 비겁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비견과 겁재는 인간관계의 설정 면에서 형제, 친구, 동료 등의 개념으로 표현이 되고 있으며, 그 의식적인 의미는 느낌, 즉 정(情)이라는 표현으로 정리되는 내용이다. 이 수와 대비되는 정은 타의에서 접해오는 의식작용이다. 

사람의 의식은 누구나 타의 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타의에서 자의가 발생하며, 이렇게 상대적으로 발생한 자의적인 의식작용의 표현이 상(想)이다. 이 상은 자기가 세상에 발하는 생각을 말한다. 이는 어떤 인식을 정리해가는 과정이라는 의미에 주점을 두는 것으로 어떤 생각 속에서 어떤 각성이 도출된다. 이에 대응되는 사주의 육친성이 식상이다. 식상은 육친 흐름에서 나라는 주체가 힘을 쏟는 것으로, 내 생각은 당연히 내가 힘을 쏟아야만 하는 것이다. 생각은 이어서 내 몸의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느낌은 행동을 불러일으킴으로 밥을 담는 밥그릇이란 의미가 담기게 된다. 아울러 여자에게 식상이 자식이라는 의미가 부여되는 것은 여자에게 자식은 자기 생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각하는 힘이 모자라는, 말을 입에 담지 못하는 짐승 역시 본능적으로 그 새끼를 보살피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무엇이 강제하는 모양새가 아닌 다분히 자의적인 행동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지하는 사실이다. 이는 세상의 현상이 흐르는 원리의 본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내 의식에 내재하는 느낌으로 이어지고, 그 느낌, 즉 자각은 타의에 영향을 주는 행위를 불러일으킨다. 오온에서 행(行)은 영향력 있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에 대응하는 사주 명리의 육친은 관성(官性)이다. 관성의 대표적인 의미가 되는 것은 사회성이다. 사람의 현실이 세상을 살면서 절실하게 요구하는 것은 사회성이다. 사회성의 획득을 위해서는 꾸준한 행동의 연속에서 도출되는 행위가 요구된다. 작심삼일에 불과한 행동으로는 당연히 그저 곤란한, 기계적인 행동으로 점철된 현실에 버거운 지경이 이어질 뿐이다. 

자기 밥그릇을 보장하는 직업 역시 그것이 기능적이든 정신적이든 사회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되려면 꾸준한 연마와 연구가 필요하다. 그래서 관성에는 정성(精誠)이라는 의미가 담기게 된다. 정성은 이어서 전통적인 것에 직결된다. 어떤 내용이 온전한 전통으로 인정이 되려면 꾸준한 관리와 개선이 선행돼야 할 것은 당연하다. 전통적으로 사회적인 관리가 행하여지는 곳은 국가의 관공서로서 이 관성의 관은 관공서의 관이 차용된 것이다. 관에 즈음하는 행(行)의 의미심장이 문의 역할과 같이 출(出)과 입(入)을 분리하지 않는, 들고 나는 것을 아우르듯 관의 의미 역시 편의와 제압을 아우르는 내용이 행과 관의 연계 선상에 담겨 있다. 아울러 세속의 점유행위뿐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기도와 수행의 성취 역시 꾸준한 행위가 투입돼야 함은 당연하다. 이 당위성을 반야심경의 서두에서도 관자재보살께서 상승의 경험적인 지혜를 완성하고, 오온이 공하다는 선언을 드러내게 된 방법이 행심(行深)이란 표현을 통하여 밝히시고 있다. 행심은 곧 지극정성이며,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에 즈음하는 내용이 된다. 다시금 육친을 에둘러 행(行)을 마무리하자면 사주팔자의 육친에서 관이 부정적인 작용을 하는 모양새는 그 마음이 도둑과 강도의 심보에 해당하며, 안타깝게도 없거나 미약은 아쉬움과 부질없는 생각만이 회전되는 무위도식에 해당한다. 관의 위상을 드러내는 행위는 타의를 인식하는 것에 그 뿌리를 두어야 마땅한 것이 팔자 오행을 운용하는 육친 흐름의 원리인 것처럼 오온의 행은 색이란 본부의 전초기지와 같다. 

이제 오온(五蘊)의 끝자락인 식(識)이 남았다. 이 식을 인식(認識)이라 말하고 그에 연이어 의식의 식별(識別)작용이란다. 그래, 맞다. 그런데 이렇게 겉만 핥는 내용에 머물고 마는 설명은 오히려 오온을 이해하려는 이의 의욕적인 생각의 눈을 슬며시 가리는 괜한 수작이 될 뿐이다. 당연히 오온 체계 속의 식(識)이 인식이지 밥식(食)은 아님을 혹자가 굳이 애써 작대기 신호를 하지 않아도 누구나 쉬이 자각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인식을 인식이라 말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인식을 인식이란 단어로만 정형화시켜 생각 흐름의 정체(停滯)를 야기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인 것이다. 가르침을 자처하는 이가 어떤 인식의 내용을 설명하려 한다면 그 인식의 심화에 따라 생각이 흐를 수 있는 유연한 실마리를 학인에게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확연대오(確然大悟)까지는 아니라도 자기가 인식한 만큼이라는 전제하에 상대에게 자의적인 생각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 설명이 성실(誠實)한 설명이 될 것이다. 이처럼 식(識)을 말하면서 뭔 설명에 한(恨)이 맺힌 것 모양 설명이란 개념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의도는 다만, 이 개념 역시 오온의 식에 연결이 되는 연유이다. 이것이 왜? 하는 설명의 설명은 뒷줄로 밀어두고, 식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야말로 식은 결론이고 결과를 의미하는 것과 동시에 어떤 결과에 대한 설명 자체가 곧 식(識)이다. 

오온의 끝자락에 식이 자리하는 것은 윷가락 던지듯이 무작위로 늘여놓은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행세하는 체계를 인식하므로 그 의미가 이어지는, 깨우침에 따른 차례를 가지런히 정리하여 놓은 것이 오온의 작위적인 순서이다. 물론 세상 속에 난무하는 수 없는 의미들의 결론이 모두 완벽한 결과인 것만은 아니겠지만 미흡한 내용 역시 마침표가 찍히면 어쨌든 결론은 결론이다. 학자가 연구를 통하여 그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 식이요, 학생이 숙제를 마치는 것 역시 그 상태의 식이다. 그래서 인식은 나라는 정체성을 나타내는 자기의식의 모양새를 정하게 된다. 그런 때문에 그 인식이 고지식한 이는 머리통을 얻어맞고, 어지러운 생각을 아무렇게나 내뱉는 이는 입을 얻어맞아 그 입이 새 주둥이가 되는 것 역시 세상이 담고 있는 이치의 한 모습이다.

이 식(識)은 사주 육친의 인성(印性)과 손을 마주 잡는 것이다. 인성의 인은 도장을 뜻하는 인으로, 도장을 찍는다는 것은 결론이 났다는 것이다. 그 결론의 긍부정은 일단 차후의 문제가 된다. 따라서 인성에 문서라는 의미가 내포되는 것은 그 문서의 성질에 따라 관인이든 결재 사인이든 결정적인 말뚝이 박힌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머니라는 의미 또한 음체와 양체의 합체로 인하여 자식이라는 결과를 생산하는 까닭에서이다. 더불어 주부가 집안 살림과 정리정돈을 잘하는 것 또한 인성에 내포되는 부분으로 그 팔자의 식업(識業)이 좋은 여자인 것이다. 어떤 일이든 정리정돈은 마무리를 결하는 결과적인 내용이 되며, 잘 정돈된 결과는 안정을 구현하게 된다. 그래서 인성의 대표적인 의미로 안정을 매김하고 있다. 이와 다름없이 식은 결과이며, 그 결과가 안정을 구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오온개공(五蘊皆空)의 뒤를 이어, 도 일체고액(度 一切苦厄)이란 말씀을 통하여 나타내고 있다.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것은 정형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과정이 괴로운 멍에와 같아도 세상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야만 하는 것이다. 라는 의미가 도(度)자를 통해 분명히 표현되고 있다. 도(度) 자는 누구나 익히 알듯이 법도, 제도라는 의미를 담은 글자이다. 당연히 법도나 제도는 누구나 지키라고 제정을 한다. 굳이 지키고 겪을 것이 있다면, 이렇게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이 결코 허무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온개공의 공(空)은 오온의 본질이 어떤 정형화된 모습을 고지식하게 염두 할 필요가 없는 내용이란 힌트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지, 삶의 본질이 허무한 것이란 내용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이 부여한 세상살이에 주어진 법도인 고액의 관문(關門)을 성실하고 슬기롭게 통과하여 스스로 안정적인 세계를 구가하라는 것이다. 

또한 도(度)에는 능력적인 의미가 더불어 내포되어 있으므로 누구도 피할 수 없이 주어진 고액을 돌파할 능력을 키우지 못하게 되면 자신의 뜻밖에서 고액의 진수를 수시로 맛보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고액의 관문을 의연하게 돌파하는 현실적인 모습이 자유(自由)이다. 자유는 내 맘대로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나라는 인식의 정립이자 자존의 획득을 말한다. 그래서 자유로운 사람은 타인을 배려할 줄을 안다. 나의 자존과 더불어 상대의 자존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까닭에서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이다. 이는 공과 색이 둘이 아니며, 그것이 돌고 돌아도 여전히 그 고액의 법도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라면 한층 더 무거운 멍에를 짊어지기 전에 분발하여 넘어서라는 행간을 머금고 있는 말씀인 것이다. 이어서 역부여시(亦復如是)란 표현을 통하여 분명하게 현실적인 세상살이가 일회성의 허무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 일회성이 아닌 까닭에 태생적인 재능과 빈부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스스로 닦은 만큼의 선상에서 또 한 번의 출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일회성의 현실에서만 바라보면 더없이 불공평한 것이지만 불교와 사주 논리의 입장인 생사윤회라는 선상에서 바라본다면 더없이 공평한 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의 선상이다. 나라는 주체가 취한 성실과 나태의 면면이 사회적인 입장으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 현실의 엄연함을 바라볼 때, 이 삶을 일회성으로 치부하기에는 내가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는 사주 논리의 입장을 떠나서도 내 삶의 경험이 상주(常駐)하는 심정적인 입장에서 마저 도저히 뒷골이 무거워 받아들이기 어렵다. 더욱이 그러한 확인을 되새겨주기 위하여 정연(整然)한 논리와 신실(信實)한 가르침들을 세상은 마련하고 있음이다. 이를 아울러 생각하면 사주 논리는 자유를 불교는 자재를 주로 선언(宣言)하고 있음이지만 이 역시 색즉시공(色卽是空)의 한 모습으로 그 어울림이 본질적으로 어색할 수 없는 것이다. 

자유 하는 상태를 넘어서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을 하는 경지가 되면 바로 자재(自在)한, 자기 행위에 걸림이 없는 자유자재한 실상(實相)을 노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고액의 언덕을 넘어 상승의 집중으로 실상을 경험한 존재를 관자재(觀自在)라 이름하고 있다.

댓글()

동기감응을 하는 혼(魂)의 기질

오늘 한 생각|2022. 4. 7. 02:01

동기감응을 하는 혼(魂)의 기질

사람 육신의 내적인 체가 되는 혼의 성정은 다분히 고착된 주관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때문에 오직 형성된 자기 관념의 세계에 충실하므로 기본적으로 객관성에 대한 염두가 없다. 

사람 혼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객관적 시선이란 형성된 자기 관념에 부합되는 사실의 인지에 대해서만 객관성을 인정한다. 이는 존재의 보편적인 객관성, 그 자체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공세적인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 이 고착성의 본래는 존재의 본질인 기(氣) 에너지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형식으로 보여주는, 자연의 원리인 생과 극으로 유통되는 과정에서 자기 상의 보전을 점하는 그 시점의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장착된 기능으로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그 자체로서는 존재의 문제점이기보다 자연의 다양성을 지키는 각기의 개체가 때때의 자기 역할 수행을 위한 자연적인 선에서 부여된 기능이라 하겠다.

자연물에 있어서 개체적 고착성이 고무적인 것은 그 개체가 발생한 환경에 따른 나름의 적응에 따라 형성된 고유성으로서 그 고유성은 그 원인이 되는 환경과 상대 관계의 변화에 따라 고유한 변화를 수반하는 것인 때문이다. 이는 나는 결단코 나이되 상대성이 융합된 나가 됨으로서 자연스럽게 고유한 나로서의 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인 선에서 사람의 성정을 표현하는 혼이 삶을 드러내는 모습은 순수하게 자연적인 환경의 상대성에 따른 융화보다 그 다단한 삶의 상황에 따라 인위적 우위를 선택하는 이기적인 의식이 수반된 것이기에 그 분별로 인한 이익조건을 선택하는 경향이 짙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연물의 순수한 혼의 상태와 달리 그 기본적인 상대성의 융화로부터 변질이 된 것이기에 다분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행위를 표출하기보다 자기가 처한 관점을 위주로 더 적극적인 반응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 혼의 이기적 경직성 또한 영적인 성장의 의식적인 관문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기적인 삶은 바로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인 상대적인 화합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기 깨우침의 관문으로 작용을 한다. 영적인 성장의 관문이 되는 이기적 고착성, 즉 마음의 폐단은 현재 의식의 망치질로 제련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망치질이 잦아들고 어떤 고정관념이 자의식의 고지식한 수문장으로 버티게 되는 것은 영적인 도태를 기약하는 것에 다른 내용이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각기의 현재 의식에서 오는 마음의 공성과 수성은 자칫 우리의 삶이 단순히 이분적인 선악의 쟁탈전처럼 인식될 수 있다. 하지만 이의 본질은 물이 수증기로 순환을 하므로 만물의 생명력을 표현하듯이 나라는 하나의 존재가 주위와 아울러 살아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하늘의 생명 원리에 입각하고 있는 모습이다. 우주의 모습과 더불어 그 순환원리에 의해서 존재하는 세상의 모든 모습은 이분적인 마음으로 형성하는 융화 작용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당연하게 우리의 모든 모습이 모습일 수 있는 것은 그 모습의 음양이 정체되지 않고 순환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이 수증기를 수증기가 물을 부정한다면 그 이전에 그 존재 자체를 논할 수 없게 되는 것처럼 마음은 의식을 따라 흐르고 의식은 마음을 자유자재하게 그려낼 수 있어야만 존재의 본질을 행사하는, 하늘의 순환원리에 부합되는 주체적인 나가 성립되는 것이다.

세상 속에서 사람의 의식은 자신이 처한 환경과 주변인들의 입지를 아울러 인식하므로 자기 삶의 현재 상태를 상대적으로 가늠하게 된다. 이에 비추어 나를 인식함에 열등감이 느껴질 때 자의식은 상대적 피폐 감에 빠지곤 한다. 더구나 나태와 방종 등으로 배가된 상대적인 피폐를 각성한 현재 의식이 그 성찰 상태로 전환이 되면 그 원인은 다름 아닌 나태하고 방종한 행위를 조장하는 이면의 마음이 내가 발하는 행동의 개체성 속에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고착된 마음의 주도에 의한 타성적인 행동이 아닌, 그 타성 속에 함몰되어 있던 미약한 자기 의지를 충전하여 자기개조를 위한 의식적인 노력을 일으킬 때, 이 자기 의지에 반하는 마음들은 그 존재의 의미를 나태와 방종에 두고서 존재감을 득하고 있는 것이기에 자기 보전을 위한, 그 주도하에서 일탈하려는 의식적인 각성이 발하는 돌발행위에 대한 제재의 조치를 즉각 취하기 시작한다. 그 일차적인 내용이 그 일어난 각성 의지의 분쇄를 위하여 갖은 아쉽고, 안타까웠던 기억들을 불러일으켜 그 허무함 속에 각성 의지를 함몰시키므로 의욕 상실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착된 마음과 각성 의지의 분쟁은 대부분 경우에 있어서 그 주위로부터 작심삼일이란 핀잔을 들으며 일전의 막을 어설프게 내리고 만다. 

그런데 의외로 의식의 의지가 투철하여 마음의 은근한 방해 정도에는 굴하지 않고 기존의 나태를 거스르는 각성을 견지하며 변화를 바라는 의식의 새로움을 마음에 안착시키려 할 때, 기존의 마음은 그 수성을 위하여 더욱이 적극적으로 그 혁신행위의 분쇄를 위한 상황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바로 그 여태 삶의 주위를 흐르고 있는 동기 교류를 통한 동기감응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는 의외의 사람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 오고 한동안 무심하게 또는 소원하게 지냈던 지인과 우연처럼 살갑게 연결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등, 여러 가지로 그 의지가 갈등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감응으로 인한 갈등의 순간에 무뎌진 각성 의지의 틈새로 적당히 하고 새어 나오는 자기 설득의 목소리에 어느 사이 각성 의지는 기존 마음의 입장에 동조하게 되고, 그 각성의 뿌리가 흔들리는 상태가 되기 마련이다. 이처럼 마음은 기본적으로 고착된 성향의 고수에 있어서는 임의로 그 차질이 부합하는 상황을 연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마음의 혁신이 결단코 쉽지 않으며, 이 마음의 동기 교류 능력이 그 혁신을 절실히 원하는 이에 있어서 세속과의 단절이 필요한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실제로 마음은 의식적인 의지가 철저하지 못한 이의 삶을 주도하며, 안과 밖으로 그 미약한 의지를 그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그야말로 데리고 논다. 이렇게 그저 형성된 마음에 의한 타성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우리 존재감의 본바탕인 영적인 발전의 손실이며, 삶의 마디마디가 던져주는 상황에서 순간순간 차오르는 다급한 생각이 부정한 마음의 의도일 수 있음을 간파하지 못하고, 그에 대한 의식적인 성찰 없이 즉각적인 행동으로 전환하고 마는 결과적인 무지가 그 운명을 저급한 기운의 주파수대에 머물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고 있다.

세상의 모범적인 삶들은 고착된 마음의 테두리보다 현재 의식의 발전적인 각성 의지가 드높은 존재들이다. 이 의지가 드높을 때 그 의식의 주파수는 고양되어 있으며, 그 의식적인 행위의 연결점이 우리 삶의 본의인 발전적인 영성과 마주하고 있는 것으로 귀인이 귀연을 부르는, 유유상종하는 하늘의 섭리가 삶 속에서 바르게 펼쳐지게 된다. 그런 때문에 자기의식은 항상 그 일으킨 마음을 경계하고 다스려야만 한다. 나태한 마음은 나태한 인연을 부르고 지극한 정성은 그에 부합되는 기운이 뭉친 마음을 형성하기 때문에 그 목적하는 바에 주파수가 연결되어 의식하는 상이 현상하게 된다. 이 분명한 섭리를 “뭐 씨 나락 까먹는 소리” 정도로 치부하고 마는 것은 이 세상 속에서 발전적인 의지들이 드러내고 있는 진정한 삶의 모습들을 부정하는 어리석음 그 자체가 된다. 행여 현재 의지가 부정하게 고착된 마음의 난동을 당장은 이겨내지 못할지라도 이 마음의 고착성을 이해하는 것이 기울어져 있는 팔자의 경사각을 낮추어가는, 합리적인 인식의 선상에서 자기 동작을 바라보는 의식행위의 시작 점이 되겠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