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몸의 연결 선 사주팔자와 위파사나
마음과 몸의 연결 선 사주팔자와 위파사나
마음 알아차리기의 출발점, 명리
명리의 ‘명’이란 육신이 숨을 쉬는 동안을 말함이다. 숨을 쉰다는 것은 단순히 살아 있다가 아니라 살아간다는 의미가 적확하다. 따라서 사람이 살아가는 흐름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 명리이다. 하지만 살아가는 주체가 자신이라고 해서 삶 속에서 표출하는 자기 행위가 모두 자의적으로만 표출되지는 못한다. 운명의 상황이 구성되는 것이 자기절대성에 의한 것이 아닌 자의식과 타 의식의 접점인 상대성에서 연출되기 때문이다.
명리가 보여주는 상대성은 현시와 그것의 원인으로 자리하게 된 이면적인 것의 복합인 때문에 이는 현실적으로 마주치는 행위와 행위의 접점만이 아닌 현실의 흐름을 구성하게 된 현생이전의 자기 줄기에서 이어지는 접점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명리에서 자의식에 반하는 때때의 마음작용이 일어나는 원인이 고찰되어야 할 이유이다.
이를 업(業)이라 표현할 때, 현실이란 상황을 간섭하는 어떤 이면이 발동하는 흔적들이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는 업 상(象)을 뒷짐으로 치부하는 모습은 자기 모습을 소박하게 마주하고자 함에 있어서 정작 자기의 본질을 간과하는 것이며, 우주의 운행이 발현하는 기운의 연결에서 오는 태생적인 자기명의 출발선을 부정하는 모순을 표출하는 행태일 수밖에 없다.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말한다. “사는 것이 참!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오는 푸념 소리가 우리 삶 속에서 드물지 않다. 하지만 그 마음 먹은 대로 마치 재능 있는 재단사에게 맞춤한 옷을 자기 기분에 맞게 입은 것처럼 생각대로 적중하는 멋들어진 현실을 맞이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는 자의식에 대한 그 이면적인 상대성이 긍정적인 작용을 할 수밖에 없는 운명 프로그램을 그 업에서 연결된 자성에 이미 구축이 된 사람들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의 생활상은 굳이 뒤따르며 살피지 않아도 그 생각이 표출하는 행위는 꾸준하게 지속적일 것이다. 그에 따라 항시 주변 상황을 인식하면서 배려를 둘 것과 배척할 것을 즉시로 알아차리고 대처하는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반면에 되는 일이 없다는 푸념 줄기를 이어가는 이들 역시 그 속류를 따라가며 같이 헤엄쳐보지 않아도 그 행위의 선은 똑똑 끊어진 실밥과 같을 것이 분명하다. 그 살아가는 주변에 대한 상황적인 대처는 언제나 미흡하여, 분명 그 자신이 의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뜻밖에도 주변인 대부분의 인식이 원망이나 오해로 점철되어 있을 것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그 업이 그 현실을 그렇게 몰아가는 징후를 그 상황에서 제 때에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기 불성실의 탓이 자명하다.
이 중 특히 그 업의 어그러진 정도가 심한 것은 되는 일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솝우화에 등장하는 다리 위를 지나는 고깃덩이 입에 문, 개의 경우처럼 항시 입에 덥석 문 것을 떨어트리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애초에 갖지 못한 것보다 실질을 품었다가 놓쳐버리거나 빼앗기게 되는 것이 훨씬 그 마음을 두고두고 아프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경험 속에 담겨있는 사실로 생각이 된다.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도대체 왜 그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저지른 것일까? 그 순간에 빠진 감정을 조금만 의식적으로 살폈더라면 하는 회한이 도돌이표가 될 수밖에 없는, 지나고 생각하면 실로 어처구니없는 행동의 결과, 그런 결과를 초래하는 어떤 순간의 주는 감정의 본질이 현실이 닿는 상황을 인식하는 자의로만 표출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어처구니없는 불행을 애써 경험해보고 싶어 하는 이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도무지 자의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경험하게 되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이것이 업에서 연결되는 운명의 발현인 것이다. 이에 순간순간 일어나는 마음이 모두 자의식에 의한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누구나 여태껏 살아오면서 경험한 자기 마음에 대한 미욱한 인식의 소치일 수밖에 없다. 분명히도 나라는 현실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업적인 작용력이 운명이란 이름으로 존재를 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이를 무의식이라 정리했다, 무의식이 말하는 무(無)는 무엇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소유의 의미처럼 무엇에 대한 자의식의 경계심을 담아내고 있는 말이다. 이에 내가 자각하는 의식 외에 나를 동작하게 하는 다른 그 무엇이 있다고 ‘꿈의 해석’에서 선언을 한 것과 같이 분명히 내 마음은 현실을 추구하는 내 생각만이 그려지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알아차리기를 체득하는 위파사나
명리에 대한 관심이 점진되는 와중에 그 제시된 이치에서 오는 업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면서 내 마음의 주파수에 연결되어 오는 업적인 작용력의 순간을 인식하고 그 부정적인 발현을 알아차리고 제어할 수 있다면 하는 생각에서 이어진 것이 ‘위파사나’ 명상이다.
위파사나는 자기 행동을 자각하는, 알아차림을 모토로 하는 관법(觀法)의 명상이다. 관은 눈으로 현시된 대상을 인식하는 견(見)을 넘어서 의식으로 살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명리 논리가 이 관의 필요를 인식하는 것에 의의가 있다면 그 체득의 방편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이 위파사나이다.
생활의 방편이 되는 어떤 기술을 사용하기에도 그 내용의 인식만으로는 실전이 불가하다. 여기에 인식을 실행하는 체득이 따라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에 따른 위파사나 훈련의 초보 단계는 대체로 자기 걸음마를 인식하며 걷는 알아차림의 보행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는 평상시에도 자기 동작의 면면을 인식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에 그 형식상의 의미가 있다. 이 몸짓 알아차리기 습관은 노인들의 치매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고 하는 일상적인 순기능의 제시에도 충분한 설득력이 담기지만 나아가 자기의식을 또 하나의 실체로 구현하는 육체를 넘어선 의식체의 완성에도 이 알아차림이 주는 차분한 걸음걸이로부터 전하는 설득력은 이해를 돕기에 부족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여담이 되겠지만 부처님 당시의 제자 중에 근기가 떨어지는 제자를 마당을 쓸게 하는 것으로 자기 수행을 삼게 하였는데,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은 이 몸짓 알아차리기의 진수를 던져주는 이야기라 하겠다.
사주팔자라는 형식으로 제시되는 명리 논리가 딱히 운명이 주는 승패의 시기만을 논하는 방술적인 관심거리로만 인식되기보다 그 이면에 도사리는 나를 떠난 나를 인식하는 마음공부가 담긴 한 생각이란 그 본의가 제대로 인식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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