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감응을 하는 혼(魂)의 기질
동기감응을 하는 혼(魂)의 기질
사람 육신의 내적인 체가 되는 혼의 성정은 다분히 고착된 주관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때문에 오직 형성된 자기 관념의 세계에 충실하므로 기본적으로 객관성에 대한 염두가 없다.
사람 혼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객관적 시선이란 형성된 자기 관념에 부합되는 사실의 인지에 대해서만 객관성을 인정한다. 이는 존재의 보편적인 객관성, 그 자체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공세적인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 이 고착성의 본래는 존재의 본질인 기(氣) 에너지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형식으로 보여주는, 자연의 원리인 생과 극으로 유통되는 과정에서 자기 상의 보전을 점하는 그 시점의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장착된 기능으로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그 자체로서는 존재의 문제점이기보다 자연의 다양성을 지키는 각기의 개체가 때때의 자기 역할 수행을 위한 자연적인 선에서 부여된 기능이라 하겠다.
자연물에 있어서 개체적 고착성이 고무적인 것은 그 개체가 발생한 환경에 따른 나름의 적응에 따라 형성된 고유성으로서 그 고유성은 그 원인이 되는 환경과 상대 관계의 변화에 따라 고유한 변화를 수반하는 것인 때문이다. 이는 나는 결단코 나이되 상대성이 융합된 나가 됨으로서 자연스럽게 고유한 나로서의 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인 선에서 사람의 성정을 표현하는 혼이 삶을 드러내는 모습은 순수하게 자연적인 환경의 상대성에 따른 융화보다 그 다단한 삶의 상황에 따라 인위적 우위를 선택하는 이기적인 의식이 수반된 것이기에 그 분별로 인한 이익조건을 선택하는 경향이 짙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연물의 순수한 혼의 상태와 달리 그 기본적인 상대성의 융화로부터 변질이 된 것이기에 다분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행위를 표출하기보다 자기가 처한 관점을 위주로 더 적극적인 반응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 혼의 이기적 경직성 또한 영적인 성장의 의식적인 관문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기적인 삶은 바로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인 상대적인 화합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기 깨우침의 관문으로 작용을 한다. 영적인 성장의 관문이 되는 이기적 고착성, 즉 마음의 폐단은 현재 의식의 망치질로 제련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망치질이 잦아들고 어떤 고정관념이 자의식의 고지식한 수문장으로 버티게 되는 것은 영적인 도태를 기약하는 것에 다른 내용이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각기의 현재 의식에서 오는 마음의 공성과 수성은 자칫 우리의 삶이 단순히 이분적인 선악의 쟁탈전처럼 인식될 수 있다. 하지만 이의 본질은 물이 수증기로 순환을 하므로 만물의 생명력을 표현하듯이 나라는 하나의 존재가 주위와 아울러 살아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하늘의 생명 원리에 입각하고 있는 모습이다. 우주의 모습과 더불어 그 순환원리에 의해서 존재하는 세상의 모든 모습은 이분적인 마음으로 형성하는 융화 작용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당연하게 우리의 모든 모습이 모습일 수 있는 것은 그 모습의 음양이 정체되지 않고 순환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이 수증기를 수증기가 물을 부정한다면 그 이전에 그 존재 자체를 논할 수 없게 되는 것처럼 마음은 의식을 따라 흐르고 의식은 마음을 자유자재하게 그려낼 수 있어야만 존재의 본질을 행사하는, 하늘의 순환원리에 부합되는 주체적인 나가 성립되는 것이다.
세상 속에서 사람의 의식은 자신이 처한 환경과 주변인들의 입지를 아울러 인식하므로 자기 삶의 현재 상태를 상대적으로 가늠하게 된다. 이에 비추어 나를 인식함에 열등감이 느껴질 때 자의식은 상대적 피폐 감에 빠지곤 한다. 더구나 나태와 방종 등으로 배가된 상대적인 피폐를 각성한 현재 의식이 그 성찰 상태로 전환이 되면 그 원인은 다름 아닌 나태하고 방종한 행위를 조장하는 이면의 마음이 내가 발하는 행동의 개체성 속에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고착된 마음의 주도에 의한 타성적인 행동이 아닌, 그 타성 속에 함몰되어 있던 미약한 자기 의지를 충전하여 자기개조를 위한 의식적인 노력을 일으킬 때, 이 자기 의지에 반하는 마음들은 그 존재의 의미를 나태와 방종에 두고서 존재감을 득하고 있는 것이기에 자기 보전을 위한, 그 주도하에서 일탈하려는 의식적인 각성이 발하는 돌발행위에 대한 제재의 조치를 즉각 취하기 시작한다. 그 일차적인 내용이 그 일어난 각성 의지의 분쇄를 위하여 갖은 아쉽고, 안타까웠던 기억들을 불러일으켜 그 허무함 속에 각성 의지를 함몰시키므로 의욕 상실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착된 마음과 각성 의지의 분쟁은 대부분 경우에 있어서 그 주위로부터 작심삼일이란 핀잔을 들으며 일전의 막을 어설프게 내리고 만다.
그런데 의외로 의식의 의지가 투철하여 마음의 은근한 방해 정도에는 굴하지 않고 기존의 나태를 거스르는 각성을 견지하며 변화를 바라는 의식의 새로움을 마음에 안착시키려 할 때, 기존의 마음은 그 수성을 위하여 더욱이 적극적으로 그 혁신행위의 분쇄를 위한 상황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바로 그 여태 삶의 주위를 흐르고 있는 동기 교류를 통한 동기감응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는 의외의 사람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 오고 한동안 무심하게 또는 소원하게 지냈던 지인과 우연처럼 살갑게 연결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등, 여러 가지로 그 의지가 갈등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감응으로 인한 갈등의 순간에 무뎌진 각성 의지의 틈새로 적당히 하고 새어 나오는 자기 설득의 목소리에 어느 사이 각성 의지는 기존 마음의 입장에 동조하게 되고, 그 각성의 뿌리가 흔들리는 상태가 되기 마련이다. 이처럼 마음은 기본적으로 고착된 성향의 고수에 있어서는 임의로 그 차질이 부합하는 상황을 연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마음의 혁신이 결단코 쉽지 않으며, 이 마음의 동기 교류 능력이 그 혁신을 절실히 원하는 이에 있어서 세속과의 단절이 필요한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실제로 마음은 의식적인 의지가 철저하지 못한 이의 삶을 주도하며, 안과 밖으로 그 미약한 의지를 그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그야말로 데리고 논다. 이렇게 그저 형성된 마음에 의한 타성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우리 존재감의 본바탕인 영적인 발전의 손실이며, 삶의 마디마디가 던져주는 상황에서 순간순간 차오르는 다급한 생각이 부정한 마음의 의도일 수 있음을 간파하지 못하고, 그에 대한 의식적인 성찰 없이 즉각적인 행동으로 전환하고 마는 결과적인 무지가 그 운명을 저급한 기운의 주파수대에 머물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고 있다.
세상의 모범적인 삶들은 고착된 마음의 테두리보다 현재 의식의 발전적인 각성 의지가 드높은 존재들이다. 이 의지가 드높을 때 그 의식의 주파수는 고양되어 있으며, 그 의식적인 행위의 연결점이 우리 삶의 본의인 발전적인 영성과 마주하고 있는 것으로 귀인이 귀연을 부르는, 유유상종하는 하늘의 섭리가 삶 속에서 바르게 펼쳐지게 된다. 그런 때문에 자기의식은 항상 그 일으킨 마음을 경계하고 다스려야만 한다. 나태한 마음은 나태한 인연을 부르고 지극한 정성은 그에 부합되는 기운이 뭉친 마음을 형성하기 때문에 그 목적하는 바에 주파수가 연결되어 의식하는 상이 현상하게 된다. 이 분명한 섭리를 “뭐 씨 나락 까먹는 소리” 정도로 치부하고 마는 것은 이 세상 속에서 발전적인 의지들이 드러내고 있는 진정한 삶의 모습들을 부정하는 어리석음 그 자체가 된다. 행여 현재 의지가 부정하게 고착된 마음의 난동을 당장은 이겨내지 못할지라도 이 마음의 고착성을 이해하는 것이 기울어져 있는 팔자의 경사각을 낮추어가는, 합리적인 인식의 선상에서 자기 동작을 바라보는 의식행위의 시작 점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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