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 육친 흐름의 대강, 비견과 겁재

명리동네 이야기|2022. 4. 14. 06:12

팔자 육친 흐름의 대강, 비견과 겁재

일반적으로 팔자의 육친 성을 논함에 우선으로 비견을 논한다. 비견에 대한 설명의 일반은 자기 본위 적이며 독립, 독보적이라 타의와의 협조나 협동심을 드러내기 어려운 성정이란 내용의 정리에 머물고 있다. 이는 비견 성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주는 양질의 전달이 되지 못한다. 우선 사주의 일주에 있어 비견 성의 존재가치와 그 상태는 자기 의지력의 정도를 논함과 아울러 의지로 단련된 개성표현의 산실이 됨에 있다.

비견이란 글자의 뜻대로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의미이다. 이 개념의 함의는 지향하는 목표를 향한 부단한 의지로서 목표치에 있는 대상과의 어깨를 나란히 함에 있다. 이를 단순하게 형제, 친구, 동년배 등을 칭하는, 동격을 논하는 내용에만 초점이 치우친 설명은 사주 육친 성에 대한 그 사고의 깊이가 대체로 조잡해질 수밖에 없다.

비견은 어떤 목표치를 바라보고 그 품격을 표출하는 대상과 자기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의지이다. 그런 마음이면 그 의지가 자주적이며, 자존적이어야 함은 당연하다. 자기 의지가 주변의 군중심리에 수시로 무작정의 동조를 하고 마는 상태이고서는 어떤 이가 어떤 분야를 지향하든 개성이 담긴 자존감이 타협이 일상인 주변에 드러나기 어렵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비견의 성정은 일반적인 수용이 점철되는 생각의 흐름에 협조, 야합하여 그 테두리 속에 안주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자주성은 자기관리를 수용하는 것으로서, 그 뒷심의 의미가 되는 정관의 역할이 동반되어야만 한다. 그 동반의 결과가 사회를 주도하는 특별한 개성에 상정되어 받아들여지게 되며, 여기에는 아울러 그 개성의 무게를 감당할만한 감수성이 인식의 뿌리에서 행사되어야 한다. 그 뿌리로 자리하는 의미가 식상이다. 이렇게 갖추어진 비견의 성정이 목표치의 대상과 그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는 것이다.

실로 비견이 견지하는 개성은 어깨동무란 정겨운 느낌에 맞닿아지게 표현된 단어의 어감처럼 자타의 정당성이 마련된 방식을 통한 자수성가를 이루어 내려는 자아성취에 충실한 자존감이 담긴 정신에서 비롯된다. 때문에, 그 성정은 형제, 친구, 동료 등에게 발전적인 기대감이 형성되어 가면서, 주변의 인정과 호응하에 의리가 담긴 협조를 이끄는 특징이 있다.

반면에 이기적이란 표현을 담아내기에 딱 들어맞는 팔자 육친의 그릇이 겁재이다. 겁재는 비견의 동체 이면이다. 겁재의 성정이 겉으로 드러내는 행위는 비견이 드러내어 보이는 행위와 별반 다름이 없이 보인다. 그러나 그 속마음은 비견이 가진 상대적인 행위의 순수성을 아예 던져버리고 있다. 겁재는 바로 위선의 대명사인 것이다.

겁재의 성정은 언제나 동상이몽에 젖어 있다. 그 속절없는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서 그 연출된 껍질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하는 말을 실감하는 것은 시간문제가 된다.

동체의 이면인 비견과 겁재가 그 활동의 뿌리를 두는 바탕이 되는 육친 성은 재성이다. 여기서 뿌리를 둔다는 것은 오행의 상생, 상극 중에서 극에 해당하는 의미이다. 이를 잠시 부연하면 상생이란 무엇이 무엇을 살리고, 상극이란 무엇이 무엇을 깨어 부순다는 가소로운 인식의 선상에서 생, 극의 의미를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생극은 음양의 의미와 같이 이면 동체의 구성이다. 무슨 나무가 불을 생 한다는 말인가? 나무는 연소재다. 연소재가 불타기 위해서는 산소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불을 생 하는 것은 나무인가, 산소인가? 연소재인 나무는 오행의 음양으로 음목(陰木)이요, 불에 활기를 불어주는 산소는 양금(陽金)이다. 이 합일이 불이 타오르게 되는 생, 극의 사실이다. 단순히 극만을 논한다고 해도, 도끼로 장작을 패는 행동과 조각가가 나무를 칼로 조각하는 행위가 본질에서는 다르지 않다. 하지만 다듬어진 시선이 요구되는 세상에서는 분명히 다른 것으로 인식된다. 이 시선 속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바탕을 가꾸고, 분탕질하는 비견과 겁재의 경우를 편집하여 살펴보는 것을 시작으로 전해지는 경험칙 전달의 요령습득에 연연하기보다, 팔자 육친 인식의 진폭이 자리하는, 인생 공부의 본연을 느낄 수 있는 장(場)으로서 팔자의 육친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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