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과 기도에 대한 소회
명상과 기도에 대한 소회
많은 이들이 명상에 관심을 가지고 그 효과적인 방법을 찾고들 있는 것 같다. 아울러 그 신봉하는 종교에 따른 신을 향한 기도를 선호하는 이들은 그야말로 부지기수이다. 하지만 이 양면으로 흐르고 있는 정신의 여정을 펼치는 나라는 바탕 면에 무엇을 우선하여 안착시켜야만 하는가에 대한 개념의 염두는 대체로 없는 것 같다.
기도는 명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명상이든 기도이든 그 행위의 시발을 이루는 그 바탕에 대한 자각을 등한시하고서는 원하는 대상에 대한 시각화를 이루어내기 어렵다.
본질적인 기도는 자기를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자기인식은 명상의 완성이며, 그 시점으로부터 진짜 기도를 할 수 있게 된다. 명상이 무색한 기도는 그 효용을 여실히 확인할 수가 없는 어둠 속을 더듬는 손짓에 불과하다. 이 일련의 순차를 통하여 우리 내면의 신실한 작용을 확인하고, 그 활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때문에 기도의 요건이 성립되는 명상에 대한 직시를 먼저 열어둘 필요가 있다.
명상의 주체는 자기의식이다. 그 핵심은 자기 생각이다. 그것은 제멋대로 일어나는 잡념과는 거리가 멀다. 생각은 깨우침의 생성이다. 깨우침은 어떤 문제에 대한 개념을 사유하고, 합리가 부합되는 자리에서 드러난다. 우리 생활 속의 작은 깨우침에 더불어 과학자가 어떤 원리를 연구하고 그 현상에 부합되는 이해의 장이 생각이며, 시인이 어떤 현상적인 모습에 대한 의식적인 절묘한 개념의 환치를 표현하여 많은 이들의 의식에 그 빛의 동조를 일으키는 인식의 깊이가 생각의 모습이다.
잡념에 휩쓸리지 않은 생각은 의식의 빛이다. 이 빛은 전등 불빛처럼 단순히 밝음을 표현하는 광(光)이 아니다. 어두운 방 안에 전등이 켜지므로 그 방의 상태와 모습이 보이듯이 상(想)으로 표현되는 어떤 구체적인 영상(映想)이 드러난 상태의 빛이다.
흔히 명상이라 이름하는 사유행위를 지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리 뒤쪽으로부터 전해지는 순간적인 자극을 느끼며, 그 사유로 비롯되는 어떤 상을 보게 된다. 이 상(想)은 꿈을 꾸는 상태와는 구별된다. 꿈으로 보는 환상은 현실의 경우와 같이 내가 그 공간 속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이 상태는 영화를 보는 모습과 같이 머릿속에 떠오른 스크린을 나 자신이 관객으로서 바라보게 된다. 이 스크린이 떠오른 상태를 엄연히 명상(瞑想)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의식이 순일해진 상태로 떠올린 스크린 속에 신봉하는 신을 등장시켜서 나의 의식을 개진할 수 있는 기도가 행하여질 수 있다면, 왜! 기도에 앞서 명상이 선행되어야 하는지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명상이 선행되지 못하는 대부분이 발하는 기도는 그 정성을 논하기에 앞서, 엄밀히 잡념의 유희에 불과하다.
우리 주위에는 명상하는 방편으로서 여러 가지 방법들이 산재하고 있다. 종교적인 내용의 염이나 묵상, 그리고 그 이외의 어떤 방법들을 막론하고 그 지속적인 행위를 통하여 명상적인 의식의 스크린을 열고, 신의 눈빛이 제대로 감각될 수 있는 기도가 두루 행해졌으면 하는 생각이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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