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는 자각시대를 여는 본격적인 표지이다.
기독교 신비주의를 주로 다루는 브라질 작가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 중에 아래와 같은 구절들이 소개되고 있다.
“신께서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미래를 잘 보여주시지 않는다. 한가지 예외가 미래가 바뀌도록 기록되어 있을 때를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미래를 짐작할 수 있을까? 그건 표지들 덕분이다.”
이 구절에 현실적인 모습을 빗대어 보면 그 표지의 먼저는 인터넷으로 표상되는 온라인이다. 그리고 나아가 그 시대적인 흐름의 생활상을 확정 짓게 하는 것이 작금에 창궐하는 코로나의 발현이다.
코로나는 바로 전체주의적인 시대에서 개별주의적인 시대로의 전환을 단적인 면으로 보여주는 명확한 표지이다.
이는 주역에서도 이미 선천과 후천을 말하고 있었던 내용에 부합되는 것으로 작금의 21세기는 선천시대를 지나 후천시대를 우리가 살아 가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는 이 시대는 쭉정이와 알곡을 가리는 심판의 시대이며, 불교적인 의미로는 이럴까 저럴까 하는 애매한 마음에서 찾는 추상적인 부처가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부처를 자각으로 바라보는 자기 각성이 우선시 되는 미륵의 시대이며, 여기에 명리학적인 의미를 더하면 집단으로 세를 과시하고 그 지도자가 일방적인 이념을 주입하고 심정의 종속을 요구하는 관성(官性)의 시대가 지나가고 자기의식의 활성인 사회적인 자기 입장의 지각이 권장되는 식상(食傷)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미래가 시작됨을 보여준 첫 번째 표지가 인터넷으로 후천이 시작된 시기와 그 괘를 같이 하여 시작된 것이다. 이는 시대적인 표지로서 그 의미에 발맞추기 위하여 우리 의식의 합체가 본능적으로 우선하여 정보의 바닷길을 개척하여 놓은 것이다. 그리고는 그 작용이 심화 되는 과정을 두고서는 본격적으로 우리의 생활 속에서 사회적인 의식과 그 생활의 방향성이 제시되는 두 번째 신의 표지가 바로 코로나의 발현인 것이다.
코로나의 창궐로 표방된 "사회적 거리 두기"에 내포된 “따로 또 같이”는 우리 속에 자리하는 각기의 나는 우리 몸의 전체성을 이루는 수많은 각기의 세포와 같이 무리의 구성원으로 단순히 소모적인 역할 인식에서 벗어나 네트워크의 본질인 전체성을 이루는 하나의 고유한 필요 거점으로서 나의 중심성에 대한 자각이 요구되는 후천시대의 사회적인 행위가 나아가야 하는 성질이 자연스럽게 내포되고 있다. 실로 각기의 나는 원의 중심과 같이 어디든 찍으면 중심되는 것처럼 이 시대는 나의 중심성에 대한 자각이 요구되고 있는 시대이다. 이 인식의 여부에 따라 알곡과 쭉정이가 가려지는 심판의 선상에서 희비가 갈리게 될 수밖에 없는 시대를 우리는 마주하고 있다.
이에 나는 “여실히 바라보고 생각하고 나아가 직관하라”는 의미를 담은 견관견(見觀見)이란 표제를 스스로 마련하고 여태도 미흡한 자각을 반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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